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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숙 시인 / 여기서부터
그렇게 있을 법하지는 않는 일이 떠오를 때 때로 바로 그 작은 확률 때문에 그 일이 사실일 거라고 생각하곤 한다 믿곤 한다, 믿고야 한다
아, 그, 작은, 확률 인상적으로 인상적인 그, 작은!
황인숙 시인 / 움찔, 아찔
햇볓에 따끈하게 데워진 쓰레기 봉투를 열자 마자 나는 움찔 물러섰다 낱낱이 몸을 트는 꽃잎들 부패한 생선 다가리에 핀 한 숭어리의 흰 국화
그들은 녹갈색과 황갈색의 진득거림을 말끔히 빨아먹고 흰 천국을 피워낸다
싸아한 정화의 냄새를 풍기며
나는 미친듯이 에프킬라를 뿌려대고 한 천국을 지옥으로 만들고 지옥을 봉했다 그들을 그들이 태어난 진득거림으로 돌려보냈다
황인숙 시인 / 웃음소리에 깨어나리라
낯선 집 낯선 가족 낯선 식사 자리에 돌연 내가 있다 어색해하는 건 나뿐 이들은 낯선 나를 개의치 않고 식사를 계속한다 하도 이상해서, 이게 꿈인가? 곰곰 생각해보니 꿈이 맞다 꿈인 줄 알면서도 어색하다 어찌나 어색한지 꿈 같지가 않다
그 세계 사람들은 얼마나 이상하게 사는 걸까? 난데없이 누군가 나타났다가 절로 사라지곤 하니
다음엔 한번 웃어보리라 그들이 깨어나리라 나를 빤히 바라보리라 봐라, 달이 오줌을 눈다 무덤 저편도 젖을 것이다.
황인숙 시인 / 원무(圓舞)
햇살이 무수한 방향으로 길을 떠나듯 저마다 다른 곳을 향하여 머리를 두고 누워 있는 우리. 저마다 다른 곳의 바람에 살갗이 터 숨쉬는 우리. 외롭다고 잠을 자는 우리. 잠 속에서도 만나지 못하는 우리. 간혹, 어떤 사람의 머리꼭지를 보고 보일뿐인 우리. 물집오른 발바닥을 부딪히며 다시 저마다 다른 곳을 향하여 머리를 두고 누워 지쳐 숨쉬는 우리.
1 어느 잠. 나는 아름다운 바다에 이르렀다. 해안의 절벽 위에서 나는 보았다. 릴낚시를 던지며 외치는 사람. 반짝이는 흰 돛단배를.
벌거벗은 바닷바람은 나의 마음을 끌어 나는 바위를 타고 내려갔다. 함성을 지르며 파도를 맞는 사람. 바다 끝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사람. 여느 갈매기보다 훨씬 작은 갈매기들이 끼룩거리며 날아올랐다. 바위는 죽은 갈매기와 깃털과 오물 그리고 빨아올려진 바닷기로 질척거렸다. 머릿속에 가까와지는 바다가 가드가 나는 무릎과 손바닥을 즐거이 더럽혔다.
바다는 조용히 나를 바라보았다. 유쾌한 사람들도 흰 돛단배도 본 적이 없는 적막한 바다는 가볍게 몸을 떨었다 나는 몸을 기울여 그를 어루만졌다. 나는 볕을 쪼이고 있는 작은 바위에 걸터앉아 햇살이 바람에 밀려오고 밀려가는 물결을 따라 바다 끝을 바라보았다. 산들산들 졸음이 불어왔다. 바다는 내 발등을 베고 순한 강아지처럼 잠들었다.
2 그 해안에 들른 것은 우연이었다. 그래서 전혀 길을 모르겠다. 눈을 감고 나는 되뇌인다. 그곳으로 가자. 그곳으로 가자.
가끔 마부는 비슷한 곳에 데려다주기는 한다. 한 사람의 머리꼭지쯤은 보여준다. 하지만 유쾌한 사람들이며 흰 돛단배 하얀 파도가 감춘 고즈넉한 그 바다는 다시 못 만났다.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中
황인숙 시인 / 유다
그리움이 크면 환상. 환상의 비눗방울을 그저 보시라. 마지지 말라. 만지지 말라. 만지지 마, 말라니까!
그리움이 크고 겁이 없으면 그를 다친다.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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