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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홍해리 시인 / 늦가을 외 9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6. 15.

홍해리 시인 / 늦가을

 

 

이제 그만 돌아서자고

돌아가자고

바람은 젖은 어깨 다독이는데

옷을 벗은 나무는 막무가내

제자리에 마냥 서 있었다.

 

찌르레기 한 마리 울고 있었다

 

늦가을이었다.

 

 


 

 

홍해리 시인 / 단순한 기쁨

 

 

나이 들수록,

 

눈이 침침해지고

귀가 희미해져도,

 

보이는 것이 더 많고

들리는 것이 더 많네.

 

둔해지는 몸으로

느끼는 것이 더 많은,

 

이 투명한 세상!

 

살아 있다는

단순한,

 

기쁨.

 

 


 

 

홍해리 시인 / 달개비 꽃

 

 

마디마디

정을 끊고

내팽개쳐도,

 

금방

새살림 차리는

저 독한 계집.

 

이제는

쳐다보지도,

말도 않는다고

 

말똥말똥 젖은 눈

하늘 홀리는

저 미친 계집.

 

 


 

 

홍해리 시인 / 담쟁이의 길

 

 

길이라곤 오직 벽뿐이어서

아니면 살아있는 나무들이라서

담쟁이는 타고 오를 수밖에 없다

밤낮없이 수직으로 기어가는 길

높을수록 바람은 거세지만

타고 오르는 힘은 더욱 푸르다

하늘이 머리 위에 있으니

숨차다고 손을 놓을 수는 없다

바람아 불어라

흔들리는 하늘길

홀로 가는 곳

길은 늘 시작이다

끄트머리는 끝의 머리이기 때문

입때껏 바람결은 부드러웠지만

벽이란 것은 쩌개지고

나무는 눈바람에 깎이기 마련

담쟁이는 맨발이라서 하늘에 오를 수 있다

너도 맨 정신이면

하늘에 닿을 수 있으리라

느릿느릿 천천히 맨발로 가거라

아득한 끄트머리를 위하여

그러나 벽아 나무야

너를 타고 오르는 내가 미안하다

 

 


 

 

홍해리 시인 / 독종(毒種)

 

 

1

 

세상에서 제일의 맛은 독이다

물고기 가운데 맛이 가장 좋은 놈은

독이 있는 복어다

 

2

 

가장 무서운 독종은 인간이다

그들의 눈에 들지 마라

아름답다고 그들이 눈독을 들이면 꽃은 시든다

귀여운 새싹이 손을 타면

애잎은 손독이 올라 그냥 말라죽는다

 

그들이 함부로덤부로 뱉어내는 말에도

독침이 있다

침 발린 말에 넘어가지 마라

말이 말벌도 되고 독화살이 되기도 한다

 

3

 

아름다운 색깔의 버섯은 독버섯이고

단풍이 고운 옻나무에도 독이 있다

 

곱고 아름다운 것들은

모두 독종이다

그러나 아름답지 못하면서도 독종이 있으니

바로 인간이라는 못된 종자이다.

 

4

 

인간은 왜 맛이 없는가?

 

 


 

 

홍해리 시인 / 마음이 도둑이다

 

 

비운다 비운다며 채우려 들고

보이지 않는 것도 보려고 들고

들리지 않는 것도 들으려 들고

먹지 못할 것까지 먹으려 들고

해서 안될 말까지 하려고 드는

요놈의 미운 마음, 도둑이구나!

 

 


 

 

홍해리 시인 / 만공(滿空)

 

 

눈을 버리면서

나는 세상을 보지 않기로 했다.

 

귀도 주면서

아무것도 듣지 않기로 했다.

 

마음을 내 마음대로 다 버리니

텅 빈 내 마음이 가득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내 것이라고,

 

바보처럼

바보처럼 안고 살았다.

 

 


 

 

홍해리 시인 / 무화과(無花果)

 

 

애 배는 것 부끄러운 일 아닌데

그녀는 왜 꼭꼭 숨기고 있는지

대체 누가 그녀를 범했을까

애비도 모르는 저 이쁜 것들, 주렁주렁,

스스로 익어 벙글어지다니

은밀이란 말이 딱 들어맞는다

오늘밤 슬그머니 문지방 넘어가 보면

어둠이 어둡지 않고 빛나고 있을까

벙어리처녀 애 뱄다고 애 먹이지 말고

울지 않는 새 울리려고 안달 마라

숨어서 하는 짓거리 더욱 달콤하다고

열매 속에선 꽃들이 난리가 아니다

질펀한 소리 고래고래 질러대며

무진무진 애쓰는 혼뜬 사내 하나 있다.

 

 


 

 

홍해리 시인 / 물의 뼈

 

 

물이 절벽을 뛰어내리는 것은

목숨 있는 것들을 세우기 위해서다

 

폭포의 흰 치맛자락 속에는

거슬러 오르는 연어 떼가 있다

 

길바닥에 던져진 바랭이나 달개비도

비가 오면 꼿꼿이 몸을 세우듯

 

빈 자리가 다 차면 주저없이 흘러내릴 뿐

물이 무리하는 법은 없다

 

생명을 세우는 것은 단단한 뼈가 아니라

물이 만드는 부드러운 뼈다

 

내 몸에 물이 가득 차야 너에게 웃음을 주고

영원으로 가는 길을 뚫는다

 

막지 마라

물은 갈 길을 갈 뿐이다

 

- 시집『황금감옥』(2008)

 

 


 

 

홍해리 시인 / 바다에 홀로 앉아

 

 

도동항 막걸리집 마루에 앉아

수평선이 까맣게 저물 때까지

수평선이 사라질 때까지

바다만 바라다봅니다

두 눈이 파랗게 물들어

바다가 될 때까지

다시 수평선이 떠오를 때까지.

 

 


 

홍해리(洪海里, 1942년) 시인

충북 청주에서 출생. 고려대 영문과 졸업(1964년). 1969년 시집 『투망도(投網圖)』를 내어 등단함. * 사단법인 우리詩진흥회, 월간《우리詩》의 대표로 활동. 시집 『투망도投網圖』 『화사기花史記』 『무교동(武橋洞)』 『우리 들의 말』 『바람 센 날의 기억을 위하여』 『대추꽃 초록 빛』 『청별(淸別)』 『은자의 북』 『난초밭 일궈 놓고』 『투명 한 슬픔』 『애란(愛蘭)』 『봄, 벼락치다』 『푸른 느낌표!』 『황금감옥』 『비밀』 『독종(毒種)』 『금강초롱』 『치매행(致梅行)』 『바람도 구멍이 있어야 운다』 『매화에 이르는 길』 과 3인 시집 (김석규 · 이영걸 · 홍해리) 『산상영음(山上詠吟)』 『바다에 뜨는 해』 원단기행(元旦記行) 이 있고, 시선집 『洪海里 詩選』 『비타민 詩』 『시인이여 詩人이여』 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