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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황인숙 시인 / 죽음의 춤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6. 17.

황인숙 시인 / 죽음의 춤

 

 

그건 가을날인데요

햇살이 노릇노릇 졸고 있는

산중턱 무덤가인데요

부들이 손짓하듯 나부끼는대요.

갈대도 억새풀도 나부끼는데요.

하늘과 산모롱 가득히

노란 깃털 파란 깃털이 흩날리는데요.

무덤의 주인들이 잠을 깨어나

가늘게 가늘게 눈을 뜨는데요.

아아 그런

가을날인데요.

 

웬 새가 쪼롱쪼롱 울며

날아가네요.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中

 

 


 

 

황인숙 시인 / 지극히 속된 기도

 

 

거리마다 교회당이 있다.

하늘에는 달이 떠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내가 가본 교회당들의 거리들.

거리들의 교회당들.

그 안에는 촛불들이 너울거렸다.

기도하는 눈꺼풀처럼.

달싹이는 입술처럼.

 

누군가 불붙여놓은 촛불 앞에서

재빨리 기도한 적이 있다.

그 기도는 지극히 속된 것이었다.

근사한 시를 쓰게 해달라는 것,

약간의 돈이 생기게 해달라는 것,

또, 나를, 용서해달라는 것.

 

교회당 안은 조심스럽고 과묵한

그리고 눈어둡고 귀어두운 노인처럼

귀기울였다.

 

내가 가본 온 거리의 교회당들.

내 가슴속 거리의 창고에, 울릴까 말까 망설이는,

울릴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를,

종들을 쟁여놓은 그 교회당들.

 

나는 기도했었다.

무구한 빗소리를 품고 있는 회색 구름 아래서

알록 양산을 쓰고.

 

 


 

 

황인숙 시인 / 진눈깨비

 

 

1.

유리창 저쪽

맑게 개인 저편

 

감기지 않는 눈

 

우리 다시 만날 때

너는 나를 기억할까?

 

내가 너를 기억할까?

 

3월,

벗을 수 없는 추위.

 

2.

네 이름 이제는

나를 울고 싶게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가끔 네 이름을 부른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어서

삶이 나를 삐치게 할 때.

 

네가 안 쓴 달력들이

파지처럼 쌓였던 나날,

이라고 하면 네게 위안이 될까?

 

오오, 미안, 화내지 말라!

나도, 미친 듯, 살고 싶다!

 

......그러면 추위가 벗어질까?

 

 


 

 

황인숙 시인 / 진눈깨비 2

- 죽은 벗에게

 

 

네 이름 이제는

나를 울고 싶게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가끔 네 이름을 부른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어서

삶이 나를 삐치게 할 때.

 

네가 안 쓴 달력들이

파지처럼 쌓였던 나날,

이라고 하면 네게 위안이 될까?

오오, 미안, 화내지 말라!

나도, 미친 듯, 살고 싶다!

 

....그러면 추위가 벗어질까?

 

 


 

 

황인숙 시인 / 참새도 혼자는 외로운가보다

 

 

  아파트 화단 나리꽃이 피어있는

  바위 위에 참새 두 마리 날아와

  부지런히 쪼아 대며 폴짝폴짝

  짹짹 폰 사진 에 담으려니

  

  가볍게  소나무 가지위로 폴짝폴짝

  바위위로 폴짝폴짝 참새도 혼자는

  외로운가보다

  참새 두 마리 짹짹

 

 


 

 

황인숙 시인 / 추운 얼굴로 웃으며

 

 

차가운 안개비 속에서 팽팽히

꽃들은 시들지도 못했다.

노랑과 빨강, 분홍 튤립들

보랏빛 히야신스

은방울꽃들의 하양.

사람들은 그 사이를

추운 얼굴로 웃으며 거닐었다.

이따금씩 해의 행방을 찾아

회색 하늘 속을 기웃거리며.

빗방울이 굵어졌다.

꽃향기가 방울져 흩어졌다.

어떤 이들은 우산을 펴 쓰고

우리는 지붕 밑을 향해 뛰었다.

손등으로 얼굴을 쓸어 닦으며

너는 맥주를 마셨다.

합석한 노인들은 달콤해 보이는 빵과 함께

김이 오르는 커피를 마셨다.

창밖에는 꽃들이

추운 얼굴로 웃고 있었다.

 

 


 

 

황인숙 시인 / 칼로 사과를 먹다

 

 

사과 껍질의 붉은 끈이

구불구불 길어진다.

사과즙이 손끝에서

손목으로 흘러내린다.

향긋한 사과 내음이 기어든다.

나는 깎은 사과를 접시 위에서 조각낸 다음

무심히 칼끝으로

한 조각 찍어올려 입에 넣는다.

"그러지 마. 칼로 음식을 먹으면

가슴 아픈 일을 당한대."

언니는 말했었다.

 

세상에는

칼로 무엇을 먹이는 사람 또한 있겠지.

(그 또한 가슴이 아프겠지)

 

칼로 사과를 먹으면서

언니의 말이 떠오르고

내가 칼로 무엇을 먹인 사람들이 떠오르고

아아, 그때 나,

왜 그랬을까......

 

나는 계속

칼로 사과를 찍어 먹는다.

(젊다는 건,

아직 가슴 아플

많은 일이 남아 있다는 건데.

그걸 아직

두려워한다는 건데.)

 

 


 

황인숙(1958년 ~ ) 시인

서울 출생.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 198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가 당선되어 등단. 1999년 제12회 동서문학상. 2004년 제23회 김수영문학상. 2018년 제63회 현대문학상 수상. 시집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문학과지성사, 1988),《슬픔이 나를 깨운다》(문학과지성사, 1990),《우리는 철새처럼 만났다》(문학과지성사, 1994),《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문학과지성사, 1998),《자명한 산책》(문학과지성사, 2003),《리스본行 야간열차》(문학과지성사, 2007),《못다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문학과지성사, 2016)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