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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성 시인 / 꽃길 - 여행자
저 꽃들은 눈에 비강에 망막에 고막에 허파꽈리에 담아두어야 한다 혈관과 세포와 살갗과 마음에 담아야 한다 카메라나 뇌가 붙잡은 것들은 죽은 꽃이다 세상 어디에 꽃잎을 위한 봉분이 있겠는가
나를 방생하러 가는 길에는 바람이 흘리고 간 피 꽃이 되어 흩날리고 피어나고 떨어진다 지나간 생의 질곡(桎梏)이 아파서 멍이 든 것들 꽃잎이 흩어지는 나비 나비가 흩어지는 꽃잎 사이사이로 멍든 채로 눈앞을 지나가는 것들
철쭉 속꽃잎이 기르는 얼룩무늬, 꽃받침 위 결가부좌, 벚나무 회화나무 서어나무 참나무 회나무 비파나무 화살나무 나무들의 회화가 들려주는 피의 항로는 바람이 수놓는 문양을 따라 끝없이 이어지고 홀린 듯 풀어진 행락객들에게, 강바닥의 속도로 흐르는 시간에게 길을 묻듯 마음을 구부리고
사비성 사자루 부소산 고란사 고란초 백마강 낙화암 천은 문수 화엄 화개 쌍계 악양 평사리 남해 금산 꽃들이 만들어 놓은 피의 항해가 끝나지 않는 자리에서 내가 놓쳐버린 서른여섯 번의 봄, 봄날 내내 눈이 먼 것들
누가 눈을 똑바로 뜨고서 저 無明을 응시할 수 있겠는가. 우주보다 더 깊은 해저 앞에서 나는 천 개의 페르소나로 피어난 망각이다 나는 심해다
피를 삼킨 바람 닿은 자리마다 뜨거운 꽃 피어난다 누가 저 꽃잎들을 해칠 수 있겠는가 또한 저 꽃잎들이 어찌 우리를 해칠 수 있겠는가 파도의 육중한 신음소리는 꽃잎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다 내 피에 불이 옮겨 붙지 않게
마음에 담아 온 꽃잎들은 썩기 전에 놓아줘야 한다 당신 안에 고여 있는 고요도 함께
웹진 『시인광장』 2010년 9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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