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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지우 시인 / 수은등 아래 벚꽃
사직공원(社稷公園) 비탈길, 벚꽃이 필 때면 나는 아팠다 견디기 위해 도취했다 피안에서 이쪽으로 터져나온 꽃들이 수은등을 받고 있을 때 그 아래에선 어떤 죄악도 아름다워 아무나 붙잡고 입맞추고 싶고 깬 소주병으로 긋고 싶은 봄밤이었다
사춘기 때 수음 직후의 그 죽어버리고 싶은 죄의식처럼, 그 똥덩어리에 뚝뚝 떨어지던 죄처럼 벚꽃이 추악하게, 다 졌을 때 나는 나의 생이 이렇게 될 줄 그때 이미 다 알았다
그때는 그 살의의 빛, 그 죄마저 부럽고 그립다 이젠 나를 떠나라고 말한, 오직 축하해주고 싶은, 늦은 사랑을 바래다주고 오는 길에서 나는 비로소 이번 생을 눈부시게 했던 벚꽃들 사이 수은등을 올려다본다
황지우 시인 / 아직은 바깥이 있다
논에 물 넣는 모내기철이 눈에 봄을 가득 채운다
흙바닥에 깔린 크다란 물거울 끝에 늙은 농부님, 발 담그고 서 있는데 붉은 저녁 빛이 斜繕으로 들어가는 마을, 묽은 논물에 立體로 내려와 있다
아, 아직은 저기에 바깥이 있다 저 바깥에 봄이 자운영꽃에 지체하고 있을 때 내 몸이 아직 여기 있어 아직은 요놈의 한세상을 알아본다
보릿대 냉갈 옮기는 담양 들녘을 노릿노릿한 늦은 봄날, 차 몰고 휙 지나간 거지만
황지우 시인 / 안부 1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어머님 문부터 열어본다. 어렸을 적에도 눈뜨자마자 엄니 코에 귀를 대보고 안도하곤 했었지만, 살았는지 죽었는지 아침마다 살며시 열어보는 문; 이 조마조마한 문지방에서 사랑은 도대체 어디까지 필사적인가? 당신은 똥싼 옷을 서랍장에 숨겨놓고 자신에서 아직 떠나지 않고 있는 생을 부끄러워하고 계셨다. 나를 이 세상에 밀어놓은 당신의 밑을 샤워기로 뿌려 씻긴 다음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빗겨드리니까 웬 꼬마 계집아이가 콧물 흘리며 얌전하게 보료 위에 앉아 계신다. 그 가벼움에 대해선 우리 말하지 말자.
황지우 시인 / 안부 2
안녕하신지요. 또 한 해 갑니다 일몰의 동작대교 난간에 서서 금빛 강을 널널하게 바라봅니다 서쪽으로 가는 도도한 물은 좀더 이곳에 머물렀다 가고 싶은 듯 한 자락 터키 카펫 같은 스스로 발광하는 수면을 남겨두고 가대요 그 빛, 찡그린 그대 실눈에도 對照해 보았으면, 했습니다
마추픽추로 들어가는 지난번 엽서, 이제야 받았습니다 숨쉬는 것마저 힘든 그 空中國家에 제 생애도 얼마간 걸쳐놓으면 다시 살고 싶은 마음 나겠지요마는 연말연시 피하여 어디 쓸쓸한 곳에 가서 하냥 멍하니, 있고 싶어요 머리 갸우뚱하고 물밑을 내려다보는 게으른 새처럼 의아하게 제 삶을 흘러가게 하게요
황지우 시인 /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초경을 막 시작한 딸아이, 이젠 내가 껴안아줄 수도 없고 생이 끔찍해졌다 딸의 일기를 이젠 훔쳐볼 수도 없게 되었다 눈빛만 형형한 아프리카 기민들 사진; "사랑의 빵을 나눕시다"라는 포스터 밑에 전 가족의 성금란을 표시해놓은 아이의 방을 나와 나는 바깥을 거닌다, 바깥; 누군가 늘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사람들을 피해 다니는 버릇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모르겠다 옷걸이에서 떨어지는 옷처럼 그 자리에서 그만 허물어져 버리고 싶은 생; 뚱뚱한 가죽부대에 담긴 내가, 어색해서, 견딜 수 없다 글쎄, 슬픔처럼 상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
그러므로,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혼자 앉아 있을 것이다 완전히 늙어서 편안해진 가죽부대를 걸치고 등뒤로 시끄러운 잡담을 담담하게 들어주면서 먼 눈으로 술잔의 수위만을 아깝게 바라볼 것이다
문제는 그런 아름다운 폐인(廢人)을 내 자신이 견딜 수 있는가, 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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