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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황지우 시인 / 수은등 아래 벚꽃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6. 17.

황지우 시인 / 수은등 아래 벚꽃

 

 

사직공원(社稷公園) 비탈길,

벚꽃이 필 때면

나는 아팠다

견디기 위해

도취했다

피안에서 이쪽으로 터져나온 꽃들이

수은등을 받고 있을 때 그 아래에선

어떤 죄악도 아름다워

아무나 붙잡고 입맞추고 싶고

깬 소주병으로 긋고 싶은 봄밤이었다

 

사춘기 때 수음 직후의 그

죽어버리고 싶은 죄의식처럼,

그 똥덩어리에 뚝뚝 떨어지던 죄처럼

벚꽃이 추악하게, 다 졌을 때

나는 나의 생이 이렇게 될 줄

그때 이미 다 알았다

 

그때는 그 살의의 빛,

그 죄마저 부럽고 그립다

이젠 나를 떠나라고 말한,

오직 축하해주고 싶은,

늦은 사랑을

바래다주고 오는 길에서

나는 비로소

이번 생을 눈부시게 했던

벚꽃들 사이 수은등을 올려다본다

 

 


 

 

황지우 시인 / 아직은 바깥이 있다

 

 

논에 물 넣는 모내기철이

눈에 봄을 가득 채운다

 

흙바닥에 깔린 크다란 물거울 끝에

늙은 농부님, 발 담그고 서 있는데

붉은 저녁 빛이 斜繕으로 들어가는 마을,

묽은 논물에 立體로 내려와 있다

 

아,

아직은 저기에 바깥이 있다

저 바깥에 봄이 자운영꽃에 지체하고 있을 때

몸이 아직 여기 있어

아직은 요놈의 한세상을 알아본다

 

보릿대 냉갈 옮기는 담양 들녘을

노릿노릿한 늦은 봄날, 차 몰고 휙 지나간 거지만

 

 


 

 

황지우 시인 / 안부 1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어머님 문부터 열어본다.

어렸을 적에도 눈뜨자마자

엄니 코에 귀를 대보고 안도하곤 했었지만,

살았는지 죽었는지 아침마다 살며시 열어보는 문;

이 조마조마한 문지방에서

사랑은 도대체 어디까지 필사적인가?

당신은 똥싼 옷을 서랍장에 숨겨놓고

자신에서 아직 떠나지 않고 있는

생을 부끄러워하고 계셨다.

나를 이 세상에 밀어놓은 당신의 밑을

샤워기로 뿌려 씻긴 다음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빗겨드리니까

웬 꼬마 계집아이가 콧물 흘리며

얌전하게 보료 위에 앉아 계신다.

그 가벼움에 대해선 우리 말하지 말자.

 

 


 

 

황지우 시인 / 안부 2

 

 

안녕하신지요. 또 한 해 갑니다

일몰의 동작대교 난간에 서서

금빛 강을 널널하게 바라봅니다

서쪽으로 가는 도도한 물은

좀더 이곳에 머물렀다 가고 싶은 듯

한 자락 터키 카펫 같은

스스로 발광하는 수면을

남겨두고 가대요

그 빛, 찡그린 그대 실눈에도

對照해 보았으면, 했습니다

 

마추픽추로 들어가는 지난번 엽서,

이제야 받았습니다

숨쉬는 것마저 힘든

그 空中國家에 제 생애도

얼마간 걸쳐놓으면 다시

살고 싶은 마음 나겠지요마는

연말연시 피하여 어디 쓸쓸한 곳에 가서

하냥 멍하니, 있고 싶어요

머리 갸우뚱하고 물밑을 내려다보는

게으른 새처럼

의아하게 제 삶을 흘러가게 하게요

 

 


 

 

황지우 시인 /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초경을 막 시작한 딸아이, 이젠 내가 껴안아줄 수도 없고

생이 끔찍해졌다

딸의 일기를 이젠 훔쳐볼 수도 없게 되었다

눈빛만 형형한 아프리카 기민들 사진;

"사랑의 빵을 나눕시다"라는 포스터 밑에 전 가족의 성금란을

표시해놓은 아이의 방을 나와 나는

바깥을 거닌다, 바깥;

누군가 늘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사람들을 피해 다니는 버릇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모르겠다

옷걸이에서 떨어지는 옷처럼

그 자리에서 그만 허물어져 버리고 싶은 생;

뚱뚱한 가죽부대에 담긴 내가, 어색해서, 견딜 수 없다

글쎄, 슬픔처럼 상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

 

그러므로,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혼자 앉아 있을 것이다

완전히 늙어서 편안해진 가죽부대를 걸치고

등뒤로 시끄러운 잡담을 담담하게 들어주면서

먼 눈으로 술잔의 수위만을 아깝게 바라볼 것이다

 

문제는 그런 아름다운 폐인(廢人)을 내 자신이

견딜 수 있는가, 이리라

 

 


 

황지우(黃芝雨, 1952 ~ ) 시인

본명은 황재우. 1972년 서울대학교 미학과에 입학하여 문리대 문학회에 가입하여 문학활동을 시작. 1973년 유신반대 시위에 연루되어 강제입영 당하였고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구속. 1981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제적되어 서강대학교 대학원으로 옮겨 1985년 철학과를 졸업하였고, 1991년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