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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강문숙 시인 / 혼자 가는 길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6. 17.

강문숙 시인 / 혼자 가는 길

 

 

내 마음 저 편에 너를 세워 두고

혼자 가는 길, 자꾸만 발이 저리다

잡목 숲 고요한 능선 아래 조그만 마을

 

거기 성급한 초저녁별들 뛰어내리다 마는지

어느 창백한 손길이 들창을 여닫는지, 아득히

창호지 구겨지는 소리, 그 끝을 따라간다

 

둥근 문고리에 찍혀 있는 지문들

낡은 문설주에 문패자국 선연하다

 

아직 네게 닿지 못한 마음 누르며

혼자 가는 이 길

누가 어둠을 탁, 탁, 치며 걸어오는지

내 마음의 둥근 문고리 잡아당기는지

 

 


 

 

강문숙 시인 / 천사표 그녀

 

 

피아노는 거대한 한 그릇 밥이었다.

높은음자리표처럼

큰오빠 수술비와 조카의 학비는 올라가고,

착하다는 말을 밥처럼 먹고살지만 늘 허기가 졌다.

 

사랑했던 첫 남자 파혼선언하고 돌아설 때도

뜨거운 밥 한 끼 먹여보내려고 부엌에서 종일 서성거렸다.

 

도마질하다가 손끝을 베었을 때,

핏물보다 눈물을 먼저 흘리기도 했다.

 

피아노 건반은 그녀가 건너뛰어야 할

세상의 징검다리였는지도 모른다.

 

천사표 그녀가 유방암 수술을 받았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래요?

 

울부짖는 그녀에게 의사는,

갓 태어난 아기가 죽을 수도 있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둘러댔다.

 

시집을 엮는다는 핑계로 거의 한 달이 넘어서야 병 문 갔다.

밋밋해진 가슴을 여밀 생각도 않고,

 

살림하랴 글쓰랴 얼마나 힘들겠노?

잔이 넘치도록 인삼차를 부어준다.

 

염치없이 블라우스를 밀고 나오는 불룩한 내 젖가슴이

왜 이렇게 민망한지.

 

그녀가 차려주는 밥을 먹는데

창 너머로 날아가는 하얀 나비 날갯짓, 눈이 시리다

 

 


 

 

강문숙 시인 / 고분 속에 살다

 

 

여자가 조심스레 문을 연다.

순간 커다란 눈동자 같은 내부가 번뜩인다.

침입자를 경계하듯 소요하는 먼지들.

먼지들의 입을 막을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엉거주춤 고분 속으로 들어선다.

고여 있던 시간들이 출렁이다가

토기의 빗금문양을 타고 흘러내린다.

무명 머릿수건을 탁탁, 털며

쌀 안치러 가는 여자의 뒤를 따라간다.

아궁이에서 매캐한 연기가 번지고

누군가 기침을 해댄다, 그 소리

고분 밖의 생애까지도 목메게 할 것이라고

속으로 중얼거려 본다.

죽음과 함께 밥 먹고 숨쉬는 시간들

쭈그러드는 쌀자루가 안절부절못했겠지만,

고분 속은 무풍지대 최후의 안식처였을까.

고분 밖에는 어느새 어둠이 깔리고,

찬바람 불어 잎들이 떨어져 내린다.

철커덕, 누군가 고분의 입구를 막는다.

아직도 그 속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나를

남겨둔 채, 서둘러 자동차에 시동을 건다.

콘크리트고분 속으로 가는 뒷모습들

불빛 속으로 사라진다

 

 


 

강문숙 시인

1955년 경북 안동에서 출생. 1991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과 1993년 《작가세계》를 통해 등단 . 시집으로  『잠그는 것들의 방향은?』(세계사, 1995)과 『탁자 위의 사막』(문학세계사, 2004) 등이 있음. 대구 문학상, 대구시인협회상 등 수상. 현재 <시. 열림>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