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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해리 시인 / 새
아내는 머릿속에 새를 기르고 있다 늘 머리가 아프다고 한다 부리로 콕콕 쪼아대는지 귀에서 새소리가 난다고 한다 구름이 끼어 있는 사시사철 새는 푸른 하늘이 그립다 한다 새는 너른 들판이 그립다 운다 갇혀 있는 새는 숨이 막혀 젹을 쪼아댄다 날아가고 싶어 아내는 새벽부터 새가 되어 운다 지저귀면서 때로는 노래로 아내의 새는 울고 있다 조롱(鳥籠) 속에 산다고 조롱 마라 갇혀 사는 새는 아프다
홍해리 시인 / 새벽 그믐달
팔월 그믐께 동쪽 하늘
앞가슴 풀어헤친 푸른 바다 위
목선 한 척 떠 있다
어둠 가득 싣고 있다 모두 부리고
쓸쓸함만 싣고 있다 모두 내리고
빈 배가 가고 있다
별 몇 개 거느리고 넉넉한,
빈배가 더 무거워 하늘이 기우뚱,
중심을 잡고 있는 우주가 있는 듯 없는 듯
이제 곧 적막에 닿으리라.
홍해리 시인 / 설마(雪馬)
눈처럼 흰 말 눈 속에 사는 말 눈 속을 달려가는 말
설마 그런 말이 있기는 하랴마는 눈처럼 흰 설마를 찾아 눈 속으로 나 홀로 헤맨다 한들
설마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만 말은 한 마리도 보이지 않고 말 달려가는 요란한 소리만 들려올 뿐
한평생 허위허위 걸어온 길이라 해도 앞이 전혀 보이지 않아 막막하니 말꾼 찾아 마량(馬糧)을 준비할 일인가
오늘 밤도 눈 쌓이는 소리 창 밖에 환한데 설마가 사람 잡는다 해도
나를 비우고 지우면서 설마 설마 하는 마음으로 설마를 찾아 길 없는 밤길을 나서네.
홍해리 시인 / 설중매(雪中梅)
창밖, 소리 없이 눈 쌓일 때 방안, 매화, 소문 없이 눈 트네 몇 생(生)을 닦고 닦아 만나는 연(緣)인지 젖 먹던 힘까지, 뽀얗게 칼날 같은 긴, 겨울밤 묵언(默言)으로 피우는 한 점 수묵(水墨) 고승, 사미니, 한 몸이나 서로 보며 보지 못하고 적멸(寂滅), 바르르, 떠는 황홀한 보궁(寶宮)이네.
홍해리 시인 / 소금과 시
소금밭에 끌려온 바다가 햇볕과 바람으로 제 몸을 다 버리고 나서야 잘 여문 소금이 영롱하게 피어난다 맛의 시종인, 아니 황제인 소금의 몸에서 밀물과 썰물이 놀고 있는 소리 들린다.
소금을 기르는 염부의 등을 타고 흘러내린 수천수만 땀방울의 울력으로 바다의 꽃, 물의 사리인 가장 맛있는 바다의 보석이 탄생하듯이,
시인은 말의 바다를 가슴에 품고 소금을 빚는 염부, 몇 달 몇 년이 무슨 대수냐면서 한 편의 시는 서서히 소금으로 익어간다.
어둔 창고 속에서 간수가 빠져나가야 달고도 짠 소금이 만들어지듯 서둘지 마라, 느긋하게 뜸을 들이며 가슴속 언어산의 시꽃은 열매를 맺는다.
홍해리 시인 / 손톱깎기-치매행·5
맑고 조용한 겨울 날 오후 따스한 양지쪽에 나와 손톱을 깎습니다 슬며시 다가온 아내가 손을 내밉니다 손톱을 깎아 달라는 말은 못하고 그냥 손을 내밀고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겨우내 내 손톱만 열심히 잘라냈지 아내의 손을 들여다본 적이 없습니다 손곱도 없는데 휴지로 닦아내고 내민 가녀린 손가락마다 손톱이 제법 자랐습니다 손톱깎이의 날카로운 양날이 내는 금속성 똑, 똑! 소리와 함께 손톱이 잘려나갑니다 함께 산 지 마흔다섯 해 처음으로, 아내의 손을 잡고 손톱을 잘라줍니다 파르르 떠는 여린 손가락 씀벅씀벅, 눈시울 자꾸만 뜨거워집니다.
홍해리 시인 / 수련(睡蓮) 그늘
수련이 물 위에 드리우는 그늘이 천 길 물속 섬려한 하늘이라면 칠흑의 아픔까지 금세 환해지겠네 그늘이란 너를 기다리며 깊어지는 내 마음의 거문고 소리 아니겠느냐 그 속에 들어와 수련꽃 무릎베개 하고 푸르게 한잠 자고 싶지 않느냐 남실남실 잔물결에 나울거리는 천마(天馬)의 발자국들 수련잎에 눈물 하나 고여 있거든 그리움의 사리라 어림치거라 물속 암자에서 피워올리는 푸른 독경의 소리 없는 해인(海印)을 무릎 꿇고 엎드려 귀 기울인다 한들 저 하얀 꽃의 속내를 짐작이나 하겠느냐 시름시름 속울음 시리게 삭아 물에 잠긴 하늘이 마냥 깊구나 물잠자리 한 마리 물탑 쌓고 날아오르거든 네 마음 이랑이랑 빗장 지르고 천마 한 마리 가슴속에 품어 두어라 수련이 드리운 그늘이 깊고 환하다.
홍해리 시인 / 숫돌은 자신을 버려 칼을 벼린다
제 몸을 바쳐 저보다 강한 칼을 먹는 숫돌,
영혼에 살이 찌면 무딘 칼이 된다.
날을 세워 살진 마음을 베려면 자신을 갈아 한 생을 빛내고,
살아 남기 위해서는 버려야 한다.
서로 맞붙어 울어야 비로소 이루는 相生,
칼과 숫돌 사이에는 시린 영혼의 눈물이 있다.
홍해리 시인 / 시인이여 시인이여 - 詩丸
말없이 살라는데 시는 써 무엇 하리 흘러가는 구름이나 바라다볼 일 산속에 숨어 사는 곧은 선비야 때 되면 산천초목 시를 토하듯 금결 같은 은결 같은 옥 같은 시를 붓 꺾어 가슴속에 새겨 두어라.
시 쓰는 일 부질없어 귀를 씻으면 바람소리 저 계곡에 시 읊는 소리 물소리 저 하늘에 시 읊는 소리 티없이 살라는데 시 써서 무엇 하리 이 가을엔 다 버리고 바람 따르자 이 저녁엔 물결 위에 마음 띄우자.
- 시집『난초밭 일궈 놓고』(1994)
홍해리 시인 / 아내새
한평생 나는 아내의 새장이었다 아내는 조롱 속에서 평생을 노래했다 아니, 울었다 깃털은 윤기를 잃고 하나 둘 빠져나갔다 삭신은 늘 쑤시고 아파 울음꽃을 피운다 이제 새장도 낡아 삐그덕대는 사립이 그냥, 열린다 아내는 창공으로 날아갈 힘이 부친다 기력이 쇠잔한 새는 조롱조롱 새장 안을 서성일 따름 붉게 지는 노을을 울고 있다 담방담방 물 위를 뛰어가는 돌처럼 온몸으로 물수제비뜨듯 신선한 아침을 노래하던 새는 겨울밤 깊은 잠을 비단실로 깁고 있다 노래도 재우고 울음도 잠재울 서서한 눈발이 한 生을 휘갑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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