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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숙 시인 / 풍경
이미 기세 높은 오전 열한시의 쨍쨍한 햇볕 속에 매연을 뿜으며 덜컹거리며 트럭도 지나가고 버스도 지나가고 오토바이도 택시도 지나다니는 대로변 길바닥에 일인용 소파가 놓여 있다 그 소파에 등받이는 뒤로 젖혀진 얼굴과 어깨를 걸치고 양쪽 팔걸이에는 팔꿈치를 걸치고 벌린 무릎과 맞붙인 발바닥과 나머지 몸뚱어리를 포근히 파묻고 한 남자가 잠들어 있다 홀연히 떨어진 방패연처럼
난데없는 그 소파 자세히 보니 눈에 익다 이따금 들르던 카페가 소파 뒤에서 철근과 시멘트 블록 파편으로 얼크러져 있다
바둑판무늬의 일인용 소파에 햇볕이 몰려 있다 한 남자가 혼곤히 잠들어 있다 홀연히 떨어진 방패연처럼
황인숙 시인 / 하늘꽃
날씨의 절세가인입니다 얼마나, 얼마나, 아름다운지! 눈이 텅 비는 것 같습니다 앞서 떨어지는 눈송이들에 걸려 뒷눈송이들이 둥둥 떠 있는 하늘까지 까마득한 대열입니다 저 너머 깊은 天空에서 어리어리한 별들이 빨려들어 함께 쏟아질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도 빨려들어 어디론가 쏟아져버릴 것 같습니다 모든 상념이 빠져나간 하양입니다 모든 소리를 삼키고 하얗게 쏟아지는 눈 오는 소리 나를 호리는 발성입니다
몇 걸음마다 멈춰 서 묵직해진 우산을 뒤집어 털어 길 위에 눈을 돌려줬습니다 계단골이 안 보이도록 쌓인 눈 아무 데나 딛고 올라가려니 자꾸만 웃음이 비어져 나옵니다 내 방에 들어서 문을 닫으니 호주머니 속에 눈이 가득 들어 있습니다.
"리스본行 야갼열차" (문학과지성사) 에서
황인숙 시인 / 하늘로 뚫린 계단
나는 계단이 좋다 이왕이면 오르막 계단이 좋다 양옆에 집집의 담장과 문들이 벽을 이루더라도 정수리만은 하늘로 뚫렸으면 좋겠다 그리 까다로운 주문도 아닌데 계단 꼭대기 집들이 서너 걸음만 뒤로 물러주면 된다
아, 정수리가 하늘로 뚫린 계단 그 층계가 스물을 넘지 않아도 한없이 한없이 뻗어 올라가네 회오리처럼 소용돌이처럼
그 너머가 보이지 않는 오르막 계단에 나는 휩쓸린다
황인숙 시인 / 화난, 환한 수풀
- 네네시 사십분! 농담이겠지? 그녀는 눈을 흡뜨고 시계를 본다 - 아아니, 아니, 시계는 고개를 살랑살랑 저으며 찰칵찰칵 제 갈 길을 간다 그녀는 지붕 위로 휙휙 날아간다 공중에서 뚝 떨어진 그녀를 보는 그의 화난, 환한 얼굴 - 날 나무라면 안 돼 - 그럼 풀이라 할게
- 자명한 산책/문학과 산책/2003
황인숙 시인 / 황사 바람 1
무수한 틈으로 꽉 짜인 꽉 짜인 어금니로 바람이 만물을 분쇄한다 신경쇠약 직전의 유리창들이 들들들들 갈린다 갈린다 틈틈 켜켜로 바스라져 하늘이 휘날린다 저 뿌연 아가리에 가시철망을 던진다면 검고 둥근 가시철망이 고딕체로 공중에 굴러다닌다면!
황인숙 시인 / 후회
깊고 깊어라, 행동뒤의 나의 생각 내 혀는 마음보다 정직했으니.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中
황인숙 시인 / 희망
어제가 좋았다 오늘도 어제가 좋았다 어제가 좋았다, 매일 내일도 어제가 좋을 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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