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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황지우 시인 / 이 문으로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6. 18.

황지우 시인 / 이 문으로

 

 

이 문으로 들어가면 넓고

이 문을 나오면 좁다

이 문에는 종교성이 있다

풀잎 하나가 풀잎의

전체를 보여 준다

제자리 걸음으로

수십 킬로 먼 곳까지 다녀온다

끼니 때마다 내 밥의

1/3을 비둘기에게 던져 주고

갇혀 있음으로

내 몸이 무장무장 투명해진다

새들이 내 흉곽으로 기어들어와

날개 짓는 소리가 소란하다

내려가고 싶다

유리 같은 땅

 

 


 

 

황지우 시인 / 이 세상의 고요

 

 

맑고 쌀쌀한 초봄 흙담벼락에 붙어 햇볕 쬐는데

멀리 동구 바깥으로 수송기 지나가는 소리 들릴 때

 

한여름 뒤란 감나무 밑 평상에서 낮잠 자고 깨어나

눈부신 햇살 아래 여기가 어딘지 모르게 집은 비어 있고

어디선가 다듬이질 소리 건너올 때

 

아무도 듣지 않는 라디오에서 일기예보가 들릴 때

 

오래된 관공서 건물이 古宮으로 드리운 늦가을의 짙은 그림자

그리고 사람들이 땅만 보면서 바삐 지나가는 것을

재판 받으러 가는 호송버스에서 힐껏 보았을 때

 

빽밀러에 國道 포플라 가로수의 먼 소실점이 들어와 있을 때

 

목탄화 같은 겨울숲이 저만치 눈보라 속에서 사라질 때

 

오랜만에 올라온 서울, 빈말로라도 집에 가서 자자는 놈도 없고

불 꺼버린 여관 앞을 혼자 서성거릴 때

 

흰 여구차가 따뜻한 봄 산으로 들어갈 때

 

그때, 이 세상은 문득 이 세상이 아닌 듯,

고요하고 무한하다

 

 


 

 

황지우 시인 / 인사

 

 

개가하고 돌아오는 사람에게 색종이 뿌리듯

가을 금남로 은행잎들이 마구 쏟아지는 걸

넋 놓고 잠시 바라보았더니

뒤에서 빵빵거린다

뒤돌아보며 은행나무를 가르키자

영업용 택시 기사도 은행나무를 가리키며 웃는다

차라리 모르는 얼굴에는 인간의 光背가 있다

 

집에 도착해서도 프라이드 차창에 붙어 있는

금빛 스티커 오늘은 하느님이 색종이 뿌려 주시는

황금나무 밑을 지나온 거다

 

 


 

 

황지우 시인 / 일 포스티노

 

 

자전거 밀고 바깥소식 가져와서는 이마를 닦는 너,

이런 허름한 헤르메스 봤나

이 섬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해보라니까는

저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으로 답한 너,

내가 그 섬을 떠나 너를 까마득하게 잊어먹었을 때

너는 밤하늘에 마이크를 대고

별을 녹음했지

胎動하는 너의 사랑을 별에게 전하고 싶었던가,

네가 그 섬을 아예 떠나버린 것은

 

그대가 번호 매긴 이 섬의 아름다운 것들, 맨 끝번호에

그대 아버지의 슬픈 바다가 롱 숏, 롱 테이크되고;

캐스팅 크레디트가 다 올라갈 때까지

나는 머리를 박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어떤 회한에 대해 나도 가도 가해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 땜에

영화관을 나와서도 갈 데 없는 길을 한참 걸었다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휘파람 불며

新村驛을 떠난 기차는 문산으로 가고

나도 한 바닷가에 오래오래 서 있고 싶었다

 

 


 

 

황지우 시인 / 재앙스런 사랑

 

 

용암물이 머리 위로 내려올 때

으스러져라 서로를 껴안은 한 남녀;

그 속에 죽음도 공것으로 녹아버리고

필사적인 사랑은 폼페이의 돌에

목의 힘줄까지 불끈 돋은

벗은 생을 정지시켜놓았구나

 

이 추운 날

터미널에 나가 기다리고 싶었던 그대,

아직 우리에게 체온이 있다면

그대와 저 얼음 속에 들어가

서로 으스져라 껴안을 때

그대 더러운 부분까지 내 것이 되는

재앙스런 사랑의

이 더운 옷자락 한가닥

걸쳐두고 싶구나

 

이 세상에서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한 말은

아무리 하기 힘든 작은 소리라 할지라도

화산암 속에서든 얼음 속에서든

하얀 김처럼 남아 있으리라

 

 


 

황지우(黃芝雨, 1952 ~ ) 시인

본명은 황재우. 1972년 서울대학교 미학과에 입학하여 문리대 문학회에 가입하여 문학활동을 시작. 1973년 유신반대 시위에 연루되어 강제입영 당하였고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구속. 1981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제적되어 서강대학교 대학원으로 옮겨 1985년 철학과를 졸업하였고, 1991년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