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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홍수희 시인 / 눈빛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6. 18.

홍수희 시인 / 눈빛

 

 

당신의 눈빛이

내 마음에 꽂히자마자

퍽, 소리가 났습니다

내 안의 것들이 한꺼번에

풀썩 주저앉는

소리였어요

어떻게 알았지요?

당신은 이미

내 마음을

찬찬히 읽고 있었습니다

감추고 싶었는데

다 들켜버리고 말았어요

 

 


 

 

홍수희 시인 / 능소화 꽃잎에 울다

 

 

한 발짝만

단 한 발짝만 물러나면

내가 보일텐데요

내 슬픔이 보일텐데요

내 분노의 정체도 보일텐데요

내가 내게서

한 발짝 물러나는 것이

이리도 어려워요

돌아가는 세상이야기

한 발짝 물러서서 바라보는 것이

이리도 어려워요

한때는 그리도 쉬워 보이던 것

내 웃음소리도

한 발짝 떨어져서 바라볼 수 있었던

시절이 있었던 것 같은데 말이지요

밤낮 이글거리는 머릿속

한 발짝만 물러서서 바라본다면

저 헝클어져 치열한 파도의 소용돌이

잠잠해질 것 같은 데도요

빗줄기 속 불면의 밤들은 아랑곳없이

아스팔트는 뜨겁게 침묵하는데

주홍빛 능소화만 흐드러지게 피었어요

그래서 그런데 눈물만 나요

 

 


 

 

홍수희 시인 / 다시 사랑하기 위하여

 

 

사랑으로 아파 본

사람은 안다

 

사랑은

포기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바램이

하나씩 생길 때마다

지우는 연습부터

해야 한다는 것을

 

그 기대가

저 혼자 자라

내 마음의 순수를

갉아먹기 전에

 

결점이 많은

그대로의 당신은

얼마나 인간적인가

 

울고 웃는

그대로의 당신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사랑이 어느 날

기대도 없이 등뒤에

감춰둔 꽃다발처럼

 

놀라운 선물을

고백하도록 사랑은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홍수희 시인 / 다시 사랑할 수 있다면

 

 

그대의 한숨이 들릴 만큼의

거리에만 서 있을게요

 

그대의 눈빛이 보일 만큼의

거리에만 서 있을게요

 

다시는 아프지 않게

너무 가까이 서 있지 않을게요

 

다시는 아프지 않게

너무 멀리에 서 있지도 않을게요

 

언제나 이웃해 있는

비오는 날의 두 그루 은행처럼

 

온몸이 젖어도 외로웁지 않게요

어깨 한 번 으쓱하며 웃고 말게요

 

 


 

 

홍수희 시인 / 마음의 간격

 

 

전화 몇 번 하지 않았다고

내가 그대를 잊은 건 아니다

너의 이름을 소리내어 말하지 않는다고

내 마음이 그대를

영영 떠난 것은 아닌 것처럼

그리운 그대여 부디,

세상의 수치로

우리들의 사랑을 논하지 말자

중요한 것은

그대와 내 마음의 간격

어느 비 오거나 눈 내리는 날에

홀로 뜨거운 찻잔을 마주 한 날에

그 누구도 아닌 네가 떠오른다면

이미 너는 내 곁에 있는 것

우리의 사랑도 거기 있는 것

이 세상 그 무엇도

너와 나 사이

다정한 마음은 어찌하지 못할 테니

 

 


 

홍수희 시인

1995년 문예지 <한국시>에서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등단. 이육사문학상 본상, 부산가톨릭문학상 본상을 수상. 부산가톨릭 문인협회, 부산 문인협회, 부산 시인협회,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회원. 시집으로 [달력 속의 노을](1997,  도서출판 빛남)과 [아직 슬픈 그대에게 보내는 편지](2003, 도서출판 띠앗), [이 그리움을 그대에게 보낸다](2007, 도서출판 한솜), [생일을 맞은 그대에게](2019, 도서출판 해드림)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