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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강문숙 시인 / 그가 나를 펼친다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6. 18.

강문숙 시인 / 그가 나를 펼친다

 

 

그를 기다리는 동안 먼 산이 젖는다

젖은 산은 가까이 다가오다가

일정한 거리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한번 더 씻은 얼굴로 바라본다.

 

젖은 산을 바라보는 것은

아직 오지 않은 그에게로 내가 가는 일.

그를 기다리는 동안 비에 젖는 것은

모두 그의 얼굴로 흐르고.

나뭇잎처럼 가슴은 두근거린다.

 

비상등 깜박이며 숲을 헤치고

그가 내 시야 속으로 들어온다.

먼 산은 비 그친 얼굴을 접는다.

숲릉 바라보지 않아도

그는 내게로 와서 이미 젖는다.

 

오랜 시간을 머금은 나무들이 걸어와

내 속에서 뿌리를 뻗는다.

꽃 피는 내가 그에게 우산을 내밀자

그가 접혀있던 나를 활짝 펼친다

 

 


 

 

강문숙 시인 / 그녀들

 

 

마뜨료쉬까, 할머니 거기 계셨군요

둥그런 통치마 마름 펼쳐놓고

반짇고리 꺼내어 바느질하다가

잠깐, 배아파 니 엄니를 낳았니라.

한 사흘 베틀 위에 앉을 일 면해서

편할 줄 알았는데, 한밤중에도

철커덕, 탁, 탁, 베틀소리 잠깨셨다지요.

 

삼십촉 알전구가 하품을 해대는 새벽녘

어렴풋한 잠결 머리맡에, 물레를 돌리시는

할머니와 처녀 엄마,

사각사각 목소리도 닮으신 당신들은

밤을 새우실 요량이시군요.

 

무명 흰 치마 입으시고 할머니,

광화문에 계시는군요.

아침이면 마이니찌신문에 전송되는

사진 속에서, 소리없는 울음 혼자 우시겠지요.

밤새워 돌리시던 물레로 짠 그 치마

아직도 입고 계시는군요.

오늘은 행진하는 촛불 속에서

소녀들이 울고 있네요.

 

학교에서 배운 대로 할머니를 열고

어머니를 꺼내니, 어쩌면 좋아요

그 속에 또 한다발의 할머니가

꾸역꾸역

 

 


 

 

강문숙 시인 / 난 네게로 가서 별이 되었으면 해

 

 

난 네게로 가서 별이 되었으면 해.

너무 화려한 불빛을 지나서

너무 근엄한 얼굴을 지나서

빛나는 어둠이 배경인

네 속에 반듯하게 박혔으면 해.

 

텅 빈 네 휘파람 소리

푸른 저녁을 감싸는 노래.

그러나 가끔씩은 울고 싶은

네 마음이었으면 해.

 

그리운 네게로 가서 별이 되었으면 해.

자주 설움 타는 네 잠 속

너무 눈부시게는 말고

너무 꽉 차게도 말고

 

네 죽을 때에야 가만히 눈감는

별이 되었으면 해.

 

 


 

 

강문숙 시인 / 반계리 은행나무

 

 

하늘을 가늠하고 있는 중이다 천년을 향해 날아가 려는 나무가 긴 팔벌려 조곤조곤 소소한 목소리로 노란 날개를 다독이고 있는 중이다 그작은 잎들마 다 800년 동안 바람이 디딘 발자국 위에 고인 햇 살 찍어 허공을 끌어당기며 오래된 뿌리의 경전을 새기는 중이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건, 아직도 무엇인가 하고 있는 진행형의 생명들 죽지않는

 

어머니 내 마음 속에 넓은 가슴으로 점점 더 커질때 도 그랬던 것처럼 어머니라는 이름은 날마다 자라고 자라 세상의 딸들에게 확장되는 중인 것처럼

 

늦가을 강원도 문막 지나 반계리 들어설 때 발뒤 꿈치가 살짝 들뜬다면 은행나무의 혼에 깃든 모신 이 천상의 금빛 자장가를 부르면서 멀리 언덕 위에 서 둥기둥기, 사람의 마을을 달래고 있는 중이므로 지그시 마음을 누르며 걸어야 한다

 

 


 

강문숙 시인

1955년 경북 안동에서 출생. 1991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과 1993년 《작가세계》를 통해 등단 . 시집으로  『잠그는 것들의 방향은?』(세계사, 1995)과 『탁자 위의 사막』(문학세계사, 2004) 등이 있음. 대구 문학상, 대구시인협회상 등 수상. 현재 <시. 열림>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