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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해리 시인 / 영혼의 사리
눈물이 얼마나 단단한 강철인가 아는 이는 죽음이 얼마나 편안한 꿈인가를 알 수 있으리
온 길을 되짚어 가는 일도 때로는 절벽 어둠의 길 평정의 봉긋한 봉분을 짓고 대지를 한 벌의 수의로 삼아
갈대들이 흔드는 발마소리 강을 건너 억새밭을 오르는 달도 이울어 밤이 오면 고요로운 휴식의 품으로
꺼이꺼이 되돌아갈 일이네 이 청정한 가을날 눈물 같은 하늘 아래.
홍해리 시인 / 옐레나 이신바예바
하늘 높이 떠밀어 준 장대를 슬쩍, 놓는 순간
한 마리 새가 되어
바르르 떠는 난초잎 같은 천평선天平線을 넘어
허공으로
날개 없는 새는 추락하지만 나는, 더 높이 날아오른다
홍해리 시인 / 오죽(烏竹)
빈 가슴속 천년 세월을 담아 노래의 집을 엮네
마디마디 시커멓게 멍이 들고 온몸이 까맣게 타도
귀 靑靑히 열고 푸르게 푸르게 서는
초겨울 대밭의 피리 소리여!
홍해리 시인 / 우리들의 말
거리를 가다 무심코 눈을 뜨면 문득 눈앞을 가로막는 산이 있다 머리칼 한 올 한 올에까지 검은 바람의 보이지 않는 손이 부끄러운 알몸의 시대 그 어둠을 가리우지 못하면서도 그 밝음을 비추이지 못하면서도 거지중천에서 날아오고 있다 한밤을 진땀으로 닦으며 새는 무력한 꿈의 오한과 패배 어깨에 무거운 죄 없는 죄의 무게 깨어 있어도 죽음의 평화와 폭력의 설움 눈뜨고 있어도 우리의 잠은 압박한다 물에 뜨고 바람이 불리우고 어둠에 묻히고 칼에 잘리는 나의 시대를 우리의 친화를 나의 외로움 우리의 무예함 한 치 앞 안개에도 가려지는 불빛 다 뚫고 달려갈 풀밭이 있다면 그 가슴속 그 아픔 속에서 첫사랑 같은 우리의 불길을 하늘 높이 올리며 살리라 한다.
홍해리 시인 / 우화(羽化)
바닥을 본 사람은 그곳이 하늘임을 안다 위를 올려다보고 일어서기 위해 발을 딛는 사람은 하늘이 눈물겨운 벽이라는 것을 마지막 날아오를 허공임을, 알고 내던져진 자리에서 젖은 몸으로 바닥을 바닥바닥 긁다 보면 드디어, 바닥은 날개가 되어 하늘을 친다 바닥이 곧 하늘이다.
홍해리 시인 / 은자의 북
나의 詩는 북, 은자의 북이다 삶의 빛과 향으로 엮는 생명의 속삭임과 격랑으로 우는,
북한산 물소리에 눈을 씻고 새소리로 귀를 채워 바람소리, 흙냄새로 마음 울리는 나의 시는 북이다, 隱者의 북.
홍해리 시인 / 자란(紫蘭)
너를 보면 숨이 멎는다
가슴속으로 타는 불꽃의 교태
심장을 다 짜서 혓바닥으로 핥고
하늘에 뿜어 올렸다 다시 초록으로 씻어
피우는 고운 불꽃 너를 보면
숨이 멎는다 현기증이 인다.
홍해리 시인 / 자화상
내 몸에 흐른 강이 몇 개 수직으로 떨어지는 폭포가 몇 개 이마에 매달린 납덩이가 몇 개 가슴 속 갈매기 깃발이 몇 개 털 빠진 기회의 꼬리가 몇 개 너무 가까워 보이지 않는 눈썹이 몇 개 아, 무엇이 무엇인가 무엇이 몇 개.
홍해리 시인 / 적아소심(赤芽素心)
세상 오다 마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비는 우주공간을 떠돌다 떠돌다 몸 바꾸기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걸어오다 뛰어오다 도망치다 다시 달라붙기도 하네 번개도 치지 않고 천둥도 울지 않고 사냥개처럼 하늘이 젖어도 그대의 행성에는 달맞이꽃이 피고 우기의 구름 사이, 문득 적아소심이 푸른 하늘처럼 잠을 깼다는 삽상한 소식이 귓속에 찬란히 피네 그리운 심정으로 꽃대를 올려 슬픔 같은 꽃잎으로 가을날을 밝히니 눈 마주치기도 두려우리, 그대여 부드러운 물칼 같은 혓바닥으로 우주의 초연한 질서를 노래하는 꽃 속으로 천리를 가면 적멸보궁 지붕 끝이 보이리.
홍해리 시인 / 절정을 위하여
조선낫 날빛 같은 사랑도 풀잎 끝의 이슬일 뿐 절정에 달하기 전 이미 내려가는 길 풀섶에 떨어진 붉은 꽃잎, 꽃잎들 하릴없이 떨어져 누운 그 위에 노랑나비 혼자 앉아 하마하마 기다리고 있다 절망이 아름답다고 노래하는 시인이여 슬픔도 눈물로 씻고 씻으면 수정 보석이 되고 상처도 꽃으로 벌어 깊을수록 향으로 피어오르는가 마음을 닦아 볼까 스스로 깊어지는 숲 속으로 들어가 흔적도 남기지 않는 바람을 만나네 무거운 마음 하나 머물고 있는 바윗속을 지나니 절정은 이미 기울어지고 풀 새 벌레 한 마리 들리지 않네 목숨 지닌 너에게나 나에게나 절정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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