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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해리 시인 / 토란잎에 이슬방울
한 치 앞까지 가리던 낙월도 안개 저기 있네
물 꽃을 피우던 뜨거운 파도와 폭포 거기 있네
아슬아슬 눈에 밟히는 슬픈 사랑 여기 있네
수정처럼 빛나는 동그마한 우주 저기 있네.
홍해리 시인 / 퇴고(推敲)
자궁에 품고 있을 때나 세상에 드러내고 나서나 또는 시집 속에 위리안치해도,
양수에 둥둥 떠다니고 있는 영원한 미숙아 아직 태어나지 않은 詩 아닌 詩,
문을 열거나 또는 두드리거나,
진화 중 또는 퇴화 중인,
나의 詩는 퇴고 중.
홍해리 시인 / 푸른 유곽 - 아카시아
오월이 오고 아카시아 초록 물이 올라 천지를 진동시키는 유백색 향기 검은 스타킹의 서양 계집애들 쭉쭉 뻗은 다리 늘어진 꽃숭어리 숭어리 댕그랑댕그랑 지독한 그리움에 흔들흔들 눈 맑고 귀 밝은 조선 사내들 다 어디로 숨어버리고 점령군 같은, 게릴라 같은 천하의 무서운 사내들 부산한 발자국 소리 요란한 거리, 거리 질펀한 사랑 어질어질 어지러운 오오, 저 진동하는 단내 흐드러진 푸른 유곽의.
홍해리 시인 / 하루살이
하루살이에게는 하루가 천년이니 하루 살이가 얼마나 멀고 무거우랴. 먹지도 않고 똥도 싸지 않고 하루 종일 날기만 하다 알만 까고 죽는다. 날개가 다 타서 더는 잉잉대며 날 수 없을 때 우주의 천년은 얼마나 짧은 것인가.
하루에 천년, 천리를 가는 것이 부끄러워 미치도록 떼지어 나는 저 하루살이 떼!
홍해리 시인 / 하얀 고독
너는 암코양이 밤 깊어 어둠이 짙을수록 울음소리 더욱 애절한 발정 난 암코양이 동녘 훤히 터 올 때 슬슬슬 꼬리를 감추며 사라지는 밤새도록 헤매 다녀 눈 붉게 충혈된 새벽 이슬에 젖은 털을 털며 사라지는 비릿한 발걸음 유령 같은.
홍해리 시인 / 하현(下弦)
초겨울 호수 아래 깊은 잠 속 물고기 한 마리 반짝 얼음장 위로 뛰어올랐다.
머릿속에 밤새 반짝이던 시 한 편 번뜩 눈을 뜨는 시월 스무사흘 새벽,
날빛을 세운 채 또랑또랑 눈뜨고 떠 있는 하늘바다의 눈썹 냉염(冷艶)함이라니!
홍해리 시인 / 해질 녘
꽃들이 만들어내는 그늘이 팽팽하다 서늘한 그늘에서도 어쩌자고 몸뚱어리는 자꾸 달뜨는가
꽃 한 송이 피울 때마다 나무는 독배를 드는데 달거리 하듯 내비치는 그리운 심사
사는 일이 밀물이고 썰물이 아니던가 꽃이 피고 꽃이 지는 세상 하늘과 땅 다를 것이 무엇인가
가만히 있어도 스스로 저물어 막막해지는 꽃 그늘 해질 녘의 풍경소리!
홍해리 시인 / 홍시
밤마다 철썩철썩 파도 소리에 섬 마을 가시버시 금슬이 좋아
바다 위에 노는 달 물 속 달 안고
물결 따라 일렁이다 흐물히 젖어
단내 나는 붉은 해 금방 밀어 올리겠네
홍시 한 알, 뚝! 떨어지겠네.
홍해리 시인 / 황태의 꿈
아가리를 꿰어 무지막지하게 매달린 채 외로운 꿈을 꾸는 명태다, 나는 눈을 맞고 얼어 밤을 지새고 낮이면 칼바람에 몸을 말리며 상덕 하덕에 줄줄이 매달려 있는 만선의 꿈 지나온 긴긴 세월의 바닷길 출렁이는 파도로 행복했었나니 부디 쫄태는 되지 말리라 피도 눈물도 씻어버렸다 갈 길은 꿈에서도 보이지 않는 오늘밤도 북풍은 거세게 불어쳐 몸뚱어리는 꽁꽁 얼어야 한다 해가 뜨면 눈을 뒤집어쓰고 밤을 지샌 나의 꿈 갈갈이 찢어져 날아가리라 말라 가는 몸 속에서 난바다 먼 파돗소리 한 켜 한 켜 사라지고 오늘도 찬 하늘 눈물 하나 반짝인다 바람 찰수록 정신 더욱 맑아지고 얼었다 녹았다 부드럽게 익어가리니 향기로운 몸으로 다시 태어나 뜨거운 그대의 바다에서 내 몸을 해산하리라.
홍해리 시인 / 흔적
창 앞 소나무 까치 한 마리 날아와 기둥서방처럼 앉아 있다 폭식하고 왔는지 나뭇가지에 부리를 닦고 이쪽저쪽을 번갈아 본다
방안을 빤히 들여다보는 저 눈 나도 맥 놓고 눈을 맞추자 마음놓아 둔 곳 따로 있는지 훌쩍 날아가 버린다 날아가고 남은 자리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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