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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홍해리 시인 / 토란잎에 이슬방울 외 9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6. 20.

홍해리 시인 / 토란잎에 이슬방울

 

 

한 치 앞까지 가리던 낙월도 안개

저기 있네

 

물 꽃을 피우던 뜨거운 파도와 폭포

거기 있네

 

아슬아슬 눈에 밟히는 슬픈 사랑

여기 있네

 

수정처럼 빛나는 동그마한 우주

저기 있네.

 

 


 

 

홍해리 시인 / 퇴고(推敲)

 

 

자궁에 품고 있을 때나

세상에 드러내고 나서나

또는

시집 속에 위리안치해도,

 

양수에 둥둥 떠다니고 있는

영원한 미숙아

아직 태어나지 않은 詩 아닌 詩,

 

문을 열거나

또는

두드리거나,

 

진화 중

또는

퇴화 중인,

 

나의 詩는 퇴고 중.

 

 


 

 

홍해리 시인 / 푸른 유곽

- 아카시아

 

 

오월이 오고

아카시아 초록 물이 올라

천지를 진동시키는

유백색 향기

검은 스타킹의 서양 계집애들

쭉쭉 뻗은 다리

늘어진 꽃숭어리 숭어리

댕그랑댕그랑

지독한 그리움에 흔들흔들

눈 맑고 귀 밝은 조선 사내들

다 어디로 숨어버리고

점령군 같은,

게릴라 같은

천하의 무서운 사내들

부산한 발자국 소리

요란한 거리, 거리

질펀한 사랑

어질어질 어지러운

오오, 저 진동하는 단내

흐드러진 푸른 유곽의.

 

 


 

 

홍해리 시인 / 하루살이

 

 

하루살이에게는

하루가 천년이니

하루 살이가 얼마나 멀고 무거우랴.

먹지도 않고

똥도 싸지 않고

하루 종일 날기만 하다

알만 까고 죽는다.

날개가 다 타서

더는 잉잉대며 날 수 없을 때

우주의 천년은 얼마나 짧은 것인가.

 

하루에 천년,

천리를 가는 것이 부끄러워

미치도록 떼지어 나는

저 하루살이 떼!

 

 


 

 

홍해리 시인 / 하얀 고독

 

 

너는

암코양이

밤 깊어 어둠이 짙을수록

울음소리 더욱 애절한

발정 난 암코양이

동녘 훤히 터 올 때

슬슬슬 꼬리를 감추며 사라지는

밤새도록 헤매 다녀

눈 붉게 충혈된

새벽 이슬에 젖은 털을 털며

사라지는

비릿한 발걸음

유령 같은.

 

 


 

 

홍해리 시인 / 하현(下弦)

 

 

초겨울 호수 아래

깊은 잠 속

물고기 한 마리

반짝

얼음장 위로 뛰어올랐다.

 

머릿속에 밤새 반짝이던

시 한 편

번뜩

눈을 뜨는

시월 스무사흘 새벽,

 

날빛을 세운 채

또랑또랑 눈뜨고

떠 있는

하늘바다의 눈썹

냉염(冷艶)함이라니!

 

 


 

 

홍해리 시인 / 해질 녘

 

 

꽃들이 만들어내는 그늘이 팽팽하다

서늘한 그늘에서도

어쩌자고 몸뚱어리는 자꾸 달뜨는가

 

꽃 한 송이 피울 때마다

나무는 독배를 드는데

달거리 하듯 내비치는 그리운 심사

 

사는 일이 밀물이고 썰물이 아니던가

꽃이 피고 꽃이 지는 세상

하늘과 땅 다를 것이 무엇인가

 

가만히 있어도

스스로 저물어 막막해지는

꽃 그늘 해질 녘의 풍경소리!

 

 


 

 

홍해리 시인 / 홍시

 

 

밤마다 철썩철썩 파도 소리에

섬 마을 가시버시 금슬이 좋아

 

바다 위에 노는 달

물 속 달 안고

 

물결 따라 일렁이다

흐물히 젖어

 

단내 나는 붉은 해

금방 밀어 올리겠네

 

홍시 한 알, 뚝!

떨어지겠네.

 

 


 

 

홍해리 시인 / 황태의 꿈

 

 

아가리를 꿰어 무지막지하게 매달린 채

외로운 꿈을 꾸는 명태다, 나는

눈을 맞고 얼어 밤을 지새고

낮이면 칼바람에 몸을 말리며

상덕 하덕에 줄줄이 매달려 있는

만선의 꿈

지나온 긴긴 세월의 바닷길

출렁이는 파도로 행복했었나니

부디 쫄태는 되지 말리라

피도 눈물도 씻어버렸다

갈 길은 꿈에서도 보이지 않는

오늘밤도 북풍은 거세게 불어쳐

몸뚱어리는 꽁꽁 얼어야 한다

해가 뜨면

눈을 뒤집어쓰고 밤을 지샌 나의 꿈

갈갈이 찢어져 날아가리라

말라 가는 몸 속에서

난바다 먼 파돗소리 한 켜 한 켜 사라지고

오늘도 찬 하늘 눈물 하나 반짝인다

바람 찰수록 정신 더욱 맑아지고

얼었다 녹았다 부드럽게 익어가리니

향기로운 몸으로 다시 태어나

뜨거운 그대의 바다에서 내 몸을 해산하리라.

 

 


 

 

홍해리 시인 / 흔적

 

 

창 앞 소나무

까치 한 마리 날아와

기둥서방처럼 앉아 있다

폭식하고 왔는지

나뭇가지에 부리를 닦고

이쪽저쪽을 번갈아 본다

 

방안을 빤히 들여다보는 저 눈

나도 맥 놓고 눈을 맞추자

마음놓아 둔 곳 따로 있는지

훌쩍 날아가 버린다

날아가고 남은 자리

따뜻하다.

 

 


 

홍해리(洪海里, 1942년) 시인

충북 청주에서 출생. 고려대 영문과 졸업(1964년). 1969년 시집 『투망도(投網圖)』를 내어 등단함. * 사단법인 우리詩진흥회, 월간《우리詩》의 대표로 활동. 시집 『투망도投網圖』 『화사기花史記』 『무교동(武橋洞)』 『우리 들의 말』 『바람 센 날의 기억을 위하여』 『대추꽃 초록 빛』 『청별(淸別)』 『은자의 북』 『난초밭 일궈 놓고』 『투명 한 슬픔』 『애란(愛蘭)』 『봄, 벼락치다』 『푸른 느낌표!』 『황금감옥』 『비밀』 『독종(毒種)』 『금강초롱』 『치매행(致梅行)』 『바람도 구멍이 있어야 운다』 『매화에 이르는 길』 과 3인 시집 (김석규 · 이영걸 · 홍해리) 『산상영음(山上詠吟)』 『바다에 뜨는 해』 원단기행(元旦記行) 이 있고, 시선집 『洪海里 詩選』 『비타민 詩』 『시인이여 詩人이여』 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