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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홍수희 시인 / 산다는 것이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6. 21.

홍수희 시인 / 산다는 것이

 

 

맨발바닥에 닿는 싸늘한 감촉,

바닥인 줄 알았는데 바닥이 아니었다.

 

바닥의 바닥에

그 바닥의 바닥의 바닥에

맨발바닥 닿았는데도

거기도 바닥이 아니었다.

 

바닥의 심연,

그 심연의 바닥에 이르기까지

나는 나를 찾을 수 없겠다.

 

바닥의 심연,

그 심연의 중심에 이르기까지

나는 내가 아니겠다.

 

산다는 것이

내 영혼의 바닥을 향해

삼가며 삼가며 거듭 삼가며

순례하는 길이란 것을

 

바닥의 바닥에

바닥의 바닥의 바닥에 이르고서야

더듬어 만져지는 것이다.

 

 


 

 

홍수희 시인 / 새해 아침

 

 

처음은 그대로 눈이 부셔라

어린 한 해가 태어나는 아침에

찬물로 얼굴을 말갛게 씻고

머리는 단정히 빗어

새벽 미사를 드리러 가는 시간

비누 냄새만 천지 가득하구나

거울 앞에 서면 어차피 낡은 후회는 가고

새날 365일만 어리디 어린 눈빛으로

가슴속을 헤집으며 파고드나니

나를 위해 살던 날은 이제 보내주잔다

우리 서로 너를 위해 살 일만 남겨두잔다

 

 


 

 

홍수희 시인 / 새해 아침에

 

 

내게는 사랑만 남게 하소서

주고서 받을 셈은 잊게 하시고

더 주지 못한 아쉬움만

갖게 하소서.

 

내게는 사랑만 남게 하소서

받고 싶은 한 마디는 잊게 하시고

주어야 할 한 마디만 내내

기억하게 하소서.

 

내게는 사랑만 남게 하소서

창가에는 불빛 하나 걸어두게 하시고

문 두드리는 소리 행여 외면하지

않게 하소서.

 

내게는 사랑만 남게 하소서

현란한 겉치레의 행적(行蹟)보다는

관심의 작은 몸짓 하나가

부디 기적의 시작임을 알게 하소서.

 

내게는 사랑만 남게 하소서

격식이나 체면에는 덤덤하게 하시고

진실로 서야 할 자리를 분별하는

견고한 지혜를 허락하소서.

 

내게는 사랑만 남게 하소서

일상(日常)의 소중함을 알게 하시고

오늘이 곧 영원으로 이어진 길 위에

놓여 있음을 알게 하소서.

 

새해에는 사랑만 남게 하소서

사랑만이 삶의 이유가 되게 하시고

오직 사랑만이 내게는 하루의

목적이 되게 하소서.........

 

 


 

 

홍수희 시인 / 섬진강 편지

 

 

다시는

기억도 하지 않으리라

다짐해 놓고

섬진강에 와서 울었다

땡볕 아래

꽃길도 지쳐 지쳐

흐느적 휘청일 때에

단숨에 달려와 바라보는

애잔한 섬진강의 잔물결이여

사랑이

어찌 저절로 되겠는가

상처마저 축복의 붕대로

감싸주어야 하리

다시는 추억도 않으리라

다짐해 놓고

오래 오래 너를 위해

기도하리라

섬진강에 와서

나는 울었다

 

 


 

 

홍수희 시인 / 송년의 노래

 

 

먼저 떠나는 너는

알지 못하리

 

한 자리에

묵묵히 서서

보내야만 하는 이의

고독한 가슴을

 

바람에 잉잉대는

전신주처럼

흰 겨울을 온몸에

휘감고 서서

 

금방이라도

싸락눈이 내릴 것 같은

차가운 하늘일랑

온통 머리에 이고

 

또 다른

내일을 기다리고 섰는

송년의 밤이여,

 

시작은 언제나

비장(悲壯)하여라!

 

 


 

홍수희 시인

1995년 문예지 <한국시>에서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등단. 이육사문학상 본상, 부산가톨릭문학상 본상을 수상. 부산가톨릭 문인협회, 부산 문인협회, 부산 시인협회,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회원. 시집으로 [달력 속의 노을](1997,  도서출판 빛남)과 [아직 슬픈 그대에게 보내는 편지](2003, 도서출판 띠앗), [이 그리움을 그대에게 보낸다](2007, 도서출판 한솜), [생일을 맞은 그대에게](2019, 도서출판 해드림)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