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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호 시인 / 강
저 강물 내가 반쯤은 건넜다고 생각했지요 저 강물 그대도 반쯤 건넜다고 생각했지요 그대가 반 내가 반 건너면 우리 강물 한 가운데서 만나 더 큰 강물되어 흐를 수도 있었으련만 돌아보면 저 강물 우리 다만 자리 바꾸었을 뿐 이쪽과 저쪽 엇갈린 채 저 강물 까마득히 손짓할 뿐
강연호 시인 / 개미
절구통만한 먹이를 문 개미 한 마리 발 밑으로 위태롭게 지나간다 저 미물 잠시 충동적인 살의가 내 발꿈치에 머문다 하지만 일용할 양식 외에는 눈길 주지 않는 저 삶의 절실한 몰두 절구통이 내 눈에는 좀쌀 한 톨이듯 한 뼘의 거리가 그에게는 이미 천산북로이므로 그는 지금 없는 길을 새로 내는게 아니다 누가 과연 미물인가 물음도 없이 그저 타박타박 화엄 세상을 건너갈 뿐이다 몸 자체가 경전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저렇게 노상 엎드려 기어다니겠는가 직립한다고 으스대는 인간만 빼고 곤충들 짐승들 물고기들 모두 오체투지의 생애를 살다 가는 것이다
그 경배를 짓밟지 마라
강연호 시인 / 건강한 슬픔
그녀로부터 전화가 왔다 오랜만이라는 안부를 건넬 틈도 없이 그녀는 문득 울음을 터뜨렸고 나는 그저 침묵했다 한때 그녀가 꿈꾸었던 사람이 있었다 나는 아니었다 나도 그때 한 여자를 원했었다 그녀는 아니었다 그 정도 아는 사이였던 그녀와 나는 그 정도 사이였기에 오래 연락이 없었다 아무 데도 가지 않았는데도 서로 멀리 있었다
전화 저쪽에서 그녀는 오래 울었다 이쪽에서 나는 늦도록 침묵했다 창문 밖에서 귓바퀴를 쫑긋 세운 나뭇잎들이 머리통을 맞댄 채 수군거리고 있었다 그럴 때 나뭇잎은 나뭇잎끼리 참 내밀해 보였다 저렇게 귀 기울인 나뭇잎과 나뭇잎 사이로 바람과 강물과 세월이 흘러가는 것이리라 그녀의 울음과 내 침묵 사이로도 바람과 강물과 세월은 또 흘러갈 것이었다
그동안 견딘다는 것에 대해 그녀와 나는 무척 긴 얘기를 나눈 것 같았다 아니 그녀나 나나 아무 얘기도 없이 다만 나뭇잎과 나뭇잎처럼 귀 기울였을 뿐이었다 분명한 사실은 그녀가 나보다는 건강하다는 것
누군가에게 스스럼없이 울음을 건넬 수 있다는 것 슬픔에도 건강이 있다 그녀는 이윽고 전화를 끊었다 그제서야 나는 혼자 깊숙이 울었다
-현대문학 2005년 9월호-
강연호 시인 / 검은 밤의 독서
그는 두꺼운 책을 읽는다 검은 밤 흰 종이 검은 글자 흰 여백 두꺼운 책은 간단히 정의된다
그는 두꺼운 책을 읽지만 소리내어 읽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두꺼운 책 속에는 두꺼운 책을 소리내어 읽는 것은 두꺼운 책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적혀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두꺼운 책은 앙다문 입술 같다 앙다문 입술에서 소리는 나올 수 없다 나올 수 없으므로 그가 책 속으로 들어간다 쿵, 두꺼운 책의 표지가 닫힌다 이제 그는 보이지 않는다
검은 밤 흰 종이 검은 글자 흰 여백 두꺼운 책은 앙다문 입술답게 조용하다
강연호 시인 / 겨울의 빛
우듬지에 겨울 햇살이 이명처럼 매달려 있다 초록이 없으므로 더이상 햇살은 빛나지 않는다 나무는 제 발치께를 우두커니 내려다본다 발로 쓸어모으는 기억은 누구에게나 허전한 법이다 한때 웅숭깊었던 그늘의 넓이를 가늠하며 나무는 체온계를 문 아이처럼 생각에 잠긴다 텅 빈 고요가 압박붕대에 묶인 허리춤을 더듬는다 동그랗게 말린 이파리 몇 장이 마저 떨어져 이미 탕진한 삶을 둔탁하게 덧칠한다 저 잎들이 움켜쥔 허공조차 내 몫이 아니었구나 바람도 없는데 나무는 진저리 친다 나뭇잎 대신 이명의 햇살이 떨어져내린다 그늘이 있던 자리를 비춘다 배추 속같이 환하다 나무를 지탱하는 힘은 이제 고요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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