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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강연호 시인 / 강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6. 21.

강연호 시인 / 강

 

 

저 강물

내가 반쯤은 건넜다고 생각했지요

저 강물

그대도 반쯤 건넜다고 생각했지요

그대가 반 내가 반 건너면

우리 강물 한 가운데서 만나

더 큰 강물되어 흐를 수도 있었으련만

돌아보면 저 강물

우리 다만 자리 바꾸었을 뿐

이쪽과 저쪽 엇갈린 채 저 강물

까마득히 손짓할 뿐

 

 


 

 

강연호 시인 / 개미

 

 

절구통만한 먹이를 문 개미 한 마리

발 밑으로 위태롭게 지나간다 저 미물

잠시 충동적인 살의가 내 발꿈치에 머문다

하지만 일용할 양식 외에는 눈길 주지 않는

저 삶의 절실한 몰두

절구통이 내 눈에는 좀쌀 한 톨이듯

한 뼘의 거리가 그에게는 이미 천산북로이므로

그는 지금 없는 길을 새로 내는게 아니다

누가 과연 미물인가 물음도 없이

그저 타박타박 화엄 세상을 건너갈 뿐이다

몸 자체가 경전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저렇게

노상 엎드려 기어다니겠는가

직립한다고 으스대는 인간만 빼고

곤충들 짐승들 물고기들

모두 오체투지의 생애를 살다 가는 것이다

 

그 경배를 짓밟지 마라

 

 


 

 

강연호 시인 / 건강한 슬픔

 

 

그녀로부터 전화가 왔다

오랜만이라는 안부를 건넬 틈도 없이

그녀는 문득 울음을 터뜨렸고 나는 그저 침묵했다

한때 그녀가 꿈꾸었던 사람이 있었다 나는 아니었다

나도 그때 한 여자를 원했었다 그녀는 아니었다

그 정도 아는 사이였던 그녀와 나는

그 정도 사이였기에 오래 연락이 없었다

아무 데도 가지 않았는데도 서로 멀리 있었다

 

전화 저쪽에서 그녀는 오래 울었다

이쪽에서 나는 늦도록 침묵했다

창문 밖에서 귓바퀴를 쫑긋 세운 나뭇잎들이

머리통을 맞댄 채 수군거리고 있었다

그럴 때 나뭇잎은 나뭇잎끼리 참 내밀해 보였다

저렇게 귀 기울인 나뭇잎과 나뭇잎 사이로

바람과 강물과 세월이 흘러가는 것이리라

그녀의 울음과 내 침묵 사이로도

바람과 강물과 세월은 또 흘러갈 것이었다

 

그동안 견딘다는 것에 대해

그녀와 나는 무척 긴 얘기를 나눈 것 같았다

아니 그녀나 나나 아무 얘기도 없이

다만 나뭇잎과 나뭇잎처럼 귀 기울였을 뿐이었다

분명한 사실은 그녀가 나보다는 건강하다는 것

 

누군가에게 스스럼없이 울음을 건넬 수 있다는 것

슬픔에도 건강이 있다

그녀는 이윽고 전화를 끊었다

그제서야 나는 혼자 깊숙이 울었다

 

-현대문학 2005년 9월호-

 

 


 

 

강연호 시인 / 검은 밤의 독서

 

 

그는 두꺼운 책을 읽는다

검은 밤 흰 종이

검은 글자 흰 여백

두꺼운 책은 간단히 정의된다

 

그는 두꺼운 책을 읽지만

소리내어 읽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두꺼운 책 속에는

두꺼운 책을 소리내어 읽는 것은

두꺼운 책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적혀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두꺼운 책은 앙다문 입술 같다

앙다문 입술에서 소리는 나올 수 없다

나올 수 없으므로 그가 책 속으로 들어간다

쿵, 두꺼운 책의 표지가 닫힌다

이제 그는 보이지 않는다

 

검은 밤 흰 종이

검은 글자 흰 여백

두꺼운 책은 앙다문 입술답게 조용하다

 

 


 

 

강연호 시인 / 겨울의 빛

 

 

우듬지에 겨울 햇살이 이명처럼 매달려 있다

초록이 없으므로 더이상 햇살은 빛나지 않는다

나무는 제 발치께를 우두커니 내려다본다

발로 쓸어모으는 기억은 누구에게나 허전한 법이다

한때 웅숭깊었던 그늘의 넓이를 가늠하며

나무는 체온계를 문 아이처럼 생각에 잠긴다

텅 빈 고요가 압박붕대에 묶인 허리춤을 더듬는다

동그랗게 말린 이파리 몇 장이 마저 떨어져

이미 탕진한 삶을 둔탁하게 덧칠한다

저 잎들이 움켜쥔 허공조차 내 몫이 아니었구나

바람도 없는데 나무는 진저리 친다

나뭇잎 대신 이명의 햇살이 떨어져내린다

그늘이 있던 자리를 비춘다 배추 속같이 환하다

나무를 지탱하는 힘은 이제 고요가 아니다

 

 


 

강연호(姜鍊鎬, 1962년 ~ ) 시인

1962년 대전 출생. 고려대학교 국문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했으며, 현재 현재 원광대학교 한국어문학부 교수로 재직중. 1991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歲寒圖〉외 아홉 편이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 1995년 제1회 현대시동인상 수상. 시집《비단길》(세계사, 1994), 《잘못 든 길이 지도를 만든다》(문학세계사, 1995), 《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문학동네, 2001), 《기억의 못갖춘마디》(문예중앙,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