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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영혜 시인 / 가위 눌리다

by 파스칼바이런 2020. 6. 20.

이영혜 시인 / 가위 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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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곤한 잠 깊어지면

  옆에 있던 벽 어느새 사라지고

  내 이부자리는 14층 까마득한 유리절벽 위

  이불도 없이 더블침대 끝으로 밀려나

  한 다리, 덜컥 떨어진다

  어린 시절 꿈속에서

  허공에 한 발을 내딛을 때마다

  이불자락 당겨 나를 구해주곤 하던 엄마는 없고

  캄캄한 추락!

  깜짝 놀라 잠이 얕아져도

  더 이상 정강이는 길어지지 않고

  다공의 등뼈만 점점 굽어질 뿐

  머리맡에 와있는 새벽의 희뿌연 손톱이

  정수리를 할퀴고 있다

 

  #

 

  시험시간은 다 끝나가는데

  낯선 방정식이 계속 앞을 가로막는다

  나와 당신처럼 X Y 변수는 도무지 풀리지 않고

  그 모호한 함수관계도 알아낼 수가 없다

  함께 해 온 시간들

  아무리 적분 해봐도 값이 구해지지 않는다

  카운트다운 초침소리에 숨이 막힌다

 

  드르렁 컥, 소리에 화들짝 놀라

  가까스로 시험지를 빠져나오니

  아직 소파 위, 등짝이 축축하다

  평생을 같이해도 풀어낼 수 없을 미지수 Z,

  안방에서 코골고 있고

  아들 아이 엎드려 잠든 환한 책상 위엔

  숫자와 기호들이 뒤엉켜 칼춤을 추고 있다

 

웹진 『시인광장』 2010년 11월호 발표

 

 


 

이영혜 시인

서울대 치과대학원 졸업. 치의학박사. 2008년《불교문예》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