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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유정이 시인 / 싸움의 기술

by 파스칼바이런 2020. 6. 15.

유정이 시인 / 싸움의 기술

 

 

  귀에서 자꾸 기차 바퀴 소리가 들려, 덜커덩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지팡이를 흔들며 들어오네

  농담처럼 생긴

  너무 오래 계속되는 공연은 딱 질색이야

  내 혐오는 너무 질긴 게 탈이지

  예고도 없이 불이 나간 객차가

  컴컴한 터널을 통과하는 동안만 실컷 울어보자고

  결심했어

  그러나 불이 켜지고도 나는 줄곧 울고 있었지

  계략이 떨어진다는 것은

  처음부터 이길 수 없는 싸움을

  시작했다는 뜻

  스스로 호랑이라고 믿는 날랜 살쾡이 어느새

  손바닥에 이겨 붙었던 흙먼지 탈탈 털고

  휘파람을 부네 먼저 그렇게 시끄러운 소리를 귓속에 장착해 둔

  그러나 고작 너는 눈 꼬리 긴 살쾡이

  나는 차라리 우아한 패배를 원하네

 

  귓속에서 자꾸 기차 바퀴 소리가 들려

  명백하고도 무거운 이 바퀴를 달고

  그리 슬프지 않은 저녁에 당도하고 싶을 뿐이야

  가도 가도 캄캄한 울음 속을

  그 남자 지팡이를 흔들며 걸어간다

  결국 이 싸움의 패인은 울음이었으나

  그렇다고 네가 이겼다는 증표는 아니야

  어느 온순한 영화의 반전처럼

  이 울음의 기차는 또다시 너라는 간이역

  농담처럼 생긴

  너무 오래 계속되는 공연을 덮치게 될 것이므로

 

웹진 『시인광장』 2010년 9월호 발표

 

 


 

유정이 시인

1963년 충남 천안에서 출생. 1986년 홍익대학교 국어교육과 졸업. 동국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 과정 마침. 1993년 《현대시학》을 통해 〈이사〉 등이 당선되어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내가 사랑한 도둑』, 『선인장 꽃기린』과 동화집 『이젠 비밀이 아니야』, 시 해설집 『현대시 함께 읽기』가 있음. 2002년 '동화 읽는 가족' 으로 푸른문학상 수상. 현재 홍익대학교 교양학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