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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호 시인 / 25시 모텔
어두운 시절의 조선팔도, 모든 명당은 초소라고 한 시인이 말했었지 이제 정정한다 도처의 네온 불빛들이 밤새 만들어내는 불야성 그래서 전혀 어둡지 않은 대명천지 대한민국의 명당은 이제 다 모텔이다 이곳은 웬 나그네들이 이렇게 많은가
저 원색의 불빛들 원초적 본능이니까 원색은 당연하다 가령 몸 파는 여자들이 사는 집과 푸줏간의 불빛이 똑같다는 사실에 몸서리칠 필요는 없다 고기를 사고 판다는 점에서는 같으니까 당연하다 25시 밤낮없이 문 열어놓는 것도 당연하다 싱싱할 때 사고 팔아야 하니까
25시 모텔 옆에는 25시 편의점이 있고 25시 야식집과 25시 산부인과도 있어야 한다 먹이사슬이니까 그리고 간판이 25시인 것도 당연하다 세상에 25시는 없으므로 저것들은 물론 헛것이지만 헛것이 보이기 시작하면 25시 잠들지 못하고 헛것의 욕망에 가위눌릴 테니까
여자는 이미 옷을 입고 나가버렸다 잘못 들어온 누군가 함부로 나를 들추어본다면 뭐 이런 게 다 있어, 혀를 차며 사라질 것이다 당연하다 내가 봐도 알몸의 나는 별볼일 없어서 나를 들추어보지 않은 지 오래지만 나쁜 놈, 그렇다고 혀 찰 것까지야
주차장까지 휘장으로 가린 곳 그런 곳은 어디나 당연히 수상하다
강연호 시인 / 9월도 저녁이면
9월도 저녁이면 바람은 이분쉼표로 분다 괄호 속의 숫자놀이처럼 노을도 생각이 많아 오래 머물고 하릴없이 도랑 막고 물장구치던 아이들 집 찾아 돌아가길 기다려 등불은 켜진다 9월도 저녁이면 습자지에 물감 번지듯 푸른 산그늘 골똘히 머금는 마을 빈집의 돌담은 제풀에 귀가 빠지고 지난여름은 어떠했나 살갗의 얼룩 지우며 저무는 일 하나로 남은 사람들은 묵묵히 밥상 물리고 이부자리를 편다 9월도 저녁이면 삶이란 죽음이란 애매한 그리움이란 손바닥에 하나 더 새겨지는 손금 같은 것 지난여름은 어떠했나 9월도 저녁이면 죄다 글썽해진다
강연호 시인 / 12월
그 해 12월 너로 인한 그리움 쪽에서 눈 내렸다 마른 삭정이 긁어 모아 군불 지피며 잊으리라 매운 다짐도 함께 쓸어 넣었지만 불티 무시로 설마 설마 소리치며 튀어올랐다 동구 향한 봉창으로 유난히 풍설 심한 듯 소식 갑갑한 시선 흐려지기 몇 번 너에게 가는 길 진작 끊어지고 말았는데 애꿎은 아궁지만 들쑤시며 인편 기다렸다 내 저어한 젊은 날의 사랑 눈 내리면 어둠도 서두르고 추억도 마찬가지 멀리 지친 산 빛깔에 겨워 자불음 청하는 불빛 자락 흔들리며 술기운 오르던 허구한 날 잊어라 잊어라 이 숙맥아, 쥐어박듯이 그 해 12월 너로 인한 그리움 쪽에서 눈 내렸다
강연호 시인 / 가을 엽서
훤칠하게 마른 빗줄기가 잠시 서성거렸습니다
바람 몇 다발 달려가다 넘어져 일제히 다시 구두끈을 조일 때 건널목 무단횡단하던 낙엽들 후이후이 휘파람 불었습니다
한 여자가 보도블럭 위에 또박또박 화장을 찍으며 지나가고 동전만 삼킨 커피자판기를 나는 용서하고 싶었습니다
빈 호주머니 속에서 아득하게 꼼지락거리는 불빛 불빛들
가을은 여전히 낯선 그리움이고 막차는 여태 오지 않는데 그대여, 얼마나 더 기다리고 얼마나 더 저물어야 합니까
강연호 시인 / 감옥
그는 오늘도 아내를 가두고 집을 나선다 문단속 잘 해, 아내는 건성 듣는다 갇힌 줄도 모르고 노상 즐겁다 라랄랄라 그릇을 씻고 청소를 하고 걸레를 빨며 정오의 희망곡을 들으며 하루가 지나간다 나이 들수록 해가 짧아지네 아내는 제법 철학적이기까지 하다 상추를 씻고 된장을 풀고 쌀을 안치는데 고장난 가로등이나 공원 근처 그는 집으로 가는 출구를 찾지 못해 헤맨다 그는 혼자 술을 마신다 그는 오늘도 집 밖의 세상에 갇혀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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