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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호 시인 / 고독의 기원
지금 그의 어깨는 고요하지만 그가 잠들었다고 믿는 사람은 없다 그를 둘러싼 입자들의 미세한 파동은 어딘지 경건한 데가 있다 귀 기울이면 낮게 살얼음이 잡힌다 허나 위로 받고 싶지 않아서 그는 돌아눕는다 오른쪽 눈과 왼쪽 눈이 만나는 법 눈물밖에는 없다
강연호 시인 / 고요
알전구의 필라멘트가 탁 끊어질 때의 잔광, 기억하는지 오늘 하늘의 별들은 잔광으로만 남는다 모두 우물을 안고 잠들었나보다 그래서 더 깊어 보인다 깊은 우물은 함부로 철벅이지 않는다 잔광의 고요가 깊을 때 우리 옷깃만 스쳤다고는 말하지 말자
강연호 시인 / 그늘
뙤약볕 아래 대운동장이 칭얼거리고 있었다 너무 더우면 저도 못 견디나부다 언제쯤 운동장은 제 홀로 그늘을 만들 수 있을 만큼 철이 들까 그때까지 한가운데 서서 내가 그늘이 되어주고 싶었다 그럼 내 그늘은 ?
내 그늘은 지금 부재중이야
강연호 시인 / 길의 감옥
나 그 길 위에 드난살았다 세월이 지나가고 그 여자도 지나갔지만 그때마다 목젖이 부어올랐다 나 목이 아파 진열장의 마네킹처럼 침묵했다 그러니까 그 여자는 세상 안에 있었고 나는 세상 밖에 있었다 그 여자 결혼해서 아이 낳고 주말이면 소풍 가고 남편과 싸운 뒤에는 더러 친정집에도 다녀갔다 곧 부를 수 없는 날이 올 텐데, 돌이킬 수 없는 날이 올 텐데 소리내어 그 여자 불러세우고 싶었지만 나 흠씬 두들겨맞은 북어 대가리처럼 입만 벌렸다 물러가라 각성하라 할말 많은 현수막은 부들부들 나부꼈다 언젠가 화살표를 따라간 상갓집에서 잃어버린 신발 아마 망자가 신고 갔으리라, 나 가볍게 포기했지만 두들겨맞은 북어는 언제 바다로 갈까 갈 수는 있는 걸까 나 맨발로 서성이며 돌아갈 날짜를 세어보았다 나로부터 멀어진 발자국이 미궁에서 놓친 실끝 같았지만 어찌보면 그 여자는 세상 밖에 있었고 나는 세상 안에 있었다 평생을 걸어봐야 제 몸의 창자 길이만큼도 안 되는 길 나 얹혀 지낸 시절의 속쓰림에 그만 빚 갚고 싶었다 하지만 닫힌 길, 문은 밖에서 잠기고 철창은 완강했다
- 시집, 『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문학동네, 2001) 중에서
강연호 시인 / 길
임의의 한 점에서 다른 점에 이르는 점들의 집합을 선이라 한다 최단거리일 때 직선이라 부른다 수학적 정의는 화두나 잠언과 닮아 있다 때로 법열을 느끼게도 한다 길이란 것도 말하자면 임의의 한 점에서 다른 점에 이르는 점들의 집합이다 최단거리일 때 지름길이라 할 것이다 임의의 한 점에서 다른 점에 이르는 동안 점들은 언제나 고통으로 갈리고 점들은 마냥 슬픔으로 꺾여 있다 수학적으로 볼 때 나는 지금 임의의 한 점 위에서 다른 점을 찾지 못해 우두커니 서 있는 셈이다 그러니까 처음의 제 몸을 가르고 꺾을 때마다 망설였을 점들의 고뇌와 번민에 대해 곰곰 생각해보고 있는 중이다
강연호 시인 / 나도 왕년에는
늦은 저녁을 먹기 위해 식당에 들어갔습니다 식당엔 사내들 몇이서 밥 대신 소주 들이켜며 저마다의 왕년을 안주 삼고 있었습니다 나도 왕년에는 소주에 밥 말아먹던 시절 있었나요 사내들의 뒷덜미를 움켜진 그림자 흔들리고 불빛에 배인 눈시울은 붉다 못해 황량했습니다 쓰디쓴 왕년을 입안에 털어 넣으며 사내들은 헐거운 삶을 더욱 풀어 놓았구요 내 늦은 저녁도 소주처럼 쓰고 차가웠습니다 쓰디쓴 밥알들을 입안에 털어 넣고 왕년인 듯 오래오래 씹고 또 씹었습니다 덧난 눈시울 쉽게 아물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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