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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호 시인 / 나무와 새
허름한 뒷골목에 나무 한 그루 기다리며 서 있었습니다 더 자라지는 않구요 거리를 떠돌던 많은 새들이 다녀갔습니다 아예 둥지를 틀지는 않구요
어느 날이라고 다를까요 나무는 언제나 머리 곱게 빗고 두 팔 흔들어 자주 지치는 도시의 새들을 불러들였습니다 놀다 가세요 쉬어 가세요 목이 쉬도록 불러들였습니다
오래 머물지는 않으면서 많은 새들이 놀다 가거나 쉬어 갔지만 그리고 그때마다 나무는 놀거나 쉬지도 못하고 늘 바빴지만
허름한 뒷골목에 나무 한 그루 말라죽어 있었습니다 세월은 순간이니까요 무심한 새들은 또 어디쯤에서 놀거나 쉬고 싶었습니다 다시 날아 가려구요
강연호 시인 / 냉장고
누군가 들판 농수로에 내다버린 냉장고 여름 다 가도록 그대로 있다 지난 봄과 달라진 건 이제 문을 활짝 열어 제 속을 온통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비탈에 비스듬히 누운 자세가 제법 선정적이다 다들 지나치면서 얼굴을 찌푸리지만 다만 그뿐 치우라고 누가 신고 좀 하지 다만 그뿐 민원 접수가 없으니 일 만들기 싫은 관청에서도 다만 그뿐, 계절만 또 바뀌나 보다 저렇게 문 열어놓으면 음식들 다 상할텐데 무엇보다 전기세 만만찮을 텐데 사람들이 혀 빼무는 줄을 아는지 모르는지 냉장고는 웅웅웅 밤낮으로 돌아간다 들판을 건너가는 바람이 모터 소리를 이쪽 아파트 단지까지 실어 나른다 바람은 빨래 빨래는 집게 집게는 입 입은 침묵 말잇기 놀이에도 심심한 냉장고 하늘에 풀칠하다 시들해진 냉장고 웅웅웅 들판을 두들기다 지친 냉장고 그의 골똘한 생각은 사실이 이렇다 전기 코드라도 누가 빼어 주었으면 좋으련만
강연호 시인 / 들판
들판은 잠들지 못한다 먼 도시의 살림이 토하는 불빛 같은 졸음 몰려올 때마다 흔들어 깨우는 풀잎들의 칭얼거림 들판은 잠들지 못한다 깨어있으라 깨어있으라 쉴 새 없이 따귀 후려치는 바람의 억센 손바닥 그러나 얼얼한 뺨 부어터진 얼굴의 아픔보다 그 손바닥마다 박힌 못자국들 안쓰러워 들판은 영영 잠들지 못한다
강연호 시인 / 마음의 서랍
이제는 완전히 지워버렸다고 자신했던 아픈 기억들 바늘처럼 찔러올 때 무수히 찔리면서 바늘귀에 매인 실오라기 따라가면 보인다 입술 다문 마음의 서랍 허나 지금까지 엎지르고 퍼담은 세월 적지 않아서 손잡이는 귀가 빠지고 깊게 패인 흠집마다 어둠 고여 있을 뿐 쉽게 열리지 않는다 도대체 얼마나 뻑뻑한 더께 쌓여 있는 걸까 마음의 서랍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힘에 겨워 나는 어쩔 줄 모른다 거기 뒤죽박죽의 또 한 세상 열면 잊혀진 시절 고스란히 살고 있는지 가늠하는 동안 어디에선가 계속 전화벨이 울려 아무도 수신하지 않는 그리움을 전송하는 소리 적박하다 나야, 외출했나보구나, 그냥 걸어봤어, 사는 게 도무지 강을 건너는 기분이야, 하염없이 되돌아오는 신호음에 대고 혼자 중얼거리듯 우두커니 서서 나는 마냥 낯설기만 한 마음의 서랍 끝내 열어보지 못한다 아무래도 외부인 출입금지의 팻말 걸린 문 앞에 서성대고 있다는 느낌이다 아니 그보다는 대낮에도 붉은 등 켜고 앉아 화투패 돌리며 쉬어가라고 가끔 고개 돌려 유혹하는 여자들의 거리에 와 있는 것만 같아 안절부절이다 순정만화처럼 고만고만한 일에 울고 웃던 날들은 이미 강 건너 어디 먼 대양에라도 떠다니는지 오늘 풍랑 심하게 일어 마음의 서랍 기우뚱거리면 멀미 어지러워 나도 쓸쓸해진다 언젠가 뭘 그렇게 감춘 것 많냐고 속 시원히 털어놓으라고 나조차 열어보지 못한 마음의 서랍 우격다짐으로 열어본 사람들 기겁하여 도망치며 혀차던
마음의 서랍은 서럽다
《현대시학》2004년 5월호 현대시동인상 당선작 中
강연호 시인 / 멜로드라마
멜로드라마는 눈물을 쥐어짠다 멜로드라마는 손수건을 적신다
비웃지 마라 멜로드라마가 슬프다면 그건 우리 삶이 슬프기 때문이다 멜로드라마가 통속적이라면 그건 우리 삶이 통속적이기 때문이다
보라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만이 멜로드라마를 보면서 울고 있지 않느냐 적어도 그들만큼은 겪어봐야 안다 삶을 연습하고 싶다면 우리는 멜로드라마에 기댈 수밖에 없다
거룩한 멜로드라마 위대한 멜로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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