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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광찬 시인 / 전광판에 새겨지는 기호학

by 파스칼바이런 2020. 6. 22.

이광찬 시인 / 전광판에 새겨지는 기호학

 

 

  전광판에 새겼다, 너의 이름들

  1234567890, 이것은

  삶이 죽음을 추모하는 방식

 

  너는 아직 나의 이름을 새겨본 적 없다

  0987654321, 전광판이

  나의 죽음을 추모하는 방식은

  이렇다 꽃잎 하나, 꽃잎 둘,

 

  죽음의 본질은 이렇다

  비주얼한 슬픔의 발광다이오드

  가령, 현상이란 이런 것이다

  바람에 꽃잎이 나부낄 때

 

  하염없이 떠가는 저 잎잎의

  주검들, 우리는 일제히 전광판을 바라본다

  너의 죽음이 곧 나의 죽음인 듯

  착각하고 또 착각한다

 

  1234567890 혹은 0987654321

  오늘도 베껴쓴다 전광판은

  죽음이라는 본질 앞에

  삶은 이런 것이다,

  모금함 구멍 안으로 꽃잎 한 장 떨어진다

 

  속수무책이다

  복제되고 복제되는, 오열들

 

웹진 『시인광장』 2010년 12월호 발표

 

 


 

이광찬 시인

2009년 계간 《서시》를 통해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