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강연호 시인 / 빈들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6. 26.

강연호 시인 / 빈들

 

 

아무도 찾아오지 않고 누구도 그립지 않은 날

혼자 쌀을 안치고 국덮히는 저녁이면

인간의 끼니가 얼마나 눈물겨운지 알게 됩니다

멀리 서툰 뜀박질을 연습하던 바람다발

귀기울이면 어느새 봉창 틈새로 기어들어와

밥물 끓어 넘치듯 안타까운 생각들을 툭툭 끊어놓고

책상 위 쓰다만 편지를 먼저 읽고 갑니다

서둘러 저녁상 물려보아도 매양 채우지 못하는

끝인사 두어줄 남은 글귀가 영 신통치 않은 채

이미 입동 지난 가을 저녁의 이내 자욱이 깔려

엉긴 실꾸리 풀듯 등불 풀어야 합니다

그래요. 이런 날에는 외투 걸치고 골목길 빠져 나와

마을 앞자락 넓게 펼쳐진 빈들에 나가지 않으렵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고 누구도 그립지 않은 날

웅크린 집들의 추위처럼 흔들리는 제 가슴 속

아 이곳이 어딥니까, 바로 빈들 아닙니까

 

 


 

 

강연호 시인 / 뾰루지를 위하여

 

 

곪아터져야 된다고 했다 그는 술을 마시며

전쟁과 학살과 제 3세계의 정치와

식민의 죽은 식탁을 두드리며

70년대의 어둠과 80년대의 울분을

싸잡아 씹어발겼다 진통제로도 항생제로도

막무가내인 뾰루지를 위하여

그는 거듭 술을 마시며

아예 곪아터져야 아무는 상처라고 했다

 

 


 

 

강연호 시인 / 사람의 그늘

 

 

사람의 그늘을 만난 지 오래다

어디 그늘이 없었을까, 눈 흐려진 탓이다

나이 들면 자꾸 멀리 보게 마련이고

멀리 건너다보는 시력으로는

사람의 그늘도 흐리게 뭉개지는 법

 

그늘을 헤아리는 심사는

어느 늙은 나뭇가지 사이로

한때 무성했던 세월이 구름처럼

뭉텅뭉텅 흘러가는 것을 바라보는 일

바람 가는 방향으로 귀를 연 이파리들의

여름에는 키가 크고 겨울에는 늘어졌을

한 시절의 내력을 가늠하는 일

우듬지 여윈 손가락이 바람을 쓸어 넘기듯

아, 나도 언젠가 저런 빗질을 받는 적이 있었더랬는데

덜 마른빨래처럼 고개 수그리고

머리를 맡겨 생각에 잠기는 일

 

지금은 없는 누군가의 서늘했던 그늘

그 어두웠던 눈 밑으로

문득 흔들렸을, 잠깐 반짝였을

불빛인지 물빛인지를 놓치지 않았으나

그저 놓치지 않았을 뿐

내가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 애써 멀리 외면했던

그늘의 길이를, 마침내는 깊이를

이제 와 곰곰 되짚는 일이다

 

그러나 눈 흐려진 지 오래

한 뼘 두 뼘 겨우 더듬을 뿐

사람의 그늘을 재어본 지 오래다

 

 


 

 

강연호 시인 / 사진

 

 

언제였을까 공원에서 한 컷

나뭇잎이 나뭇잎끼리 모여 뒹굴 듯

그늘은 그늘끼리 모여 뒹구는 속에서

누군가 찍어 놓은 사진 한 장

내 옆에서 웃고 있거나 눈을 감거나

콧등을 찡그린 사람들이 영 낯설다

언제 누가 불러 이 공원에 가서

오후의 한때를 렌즈 속에 붙잡아 놓았을까

햇살은 그늘 틈새로 튀밥처럼 흩어지고

저마다 고만고만하게 행복한 표정들

하지만 기억은 빛이 들어간 필름처럼 막막하다

기억도 기억끼리만 모여 뒹구는지

도무지 나를 거들떠보지 않는다

나는 사진 속의 나와 겨우 눈 맞춘다

끼어들지 마,사진 속의 나는

나를 힐끗 노려본 뒤 다시 표정을 잡는다

이 낡은 사진의 얼룩은 세월의 더께가 아니다

그들만의 오후를 침해받고 싶지 않다는

완강한 거부의 흔적이다

 

시집 '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 (문학동네)

 

 


 

 

강연호 시인 / 서해에서

 

 

그대 마음이 묵정밭 같아서

우리 함께 서해 바다를 보러 가자 했었지

삼각파도나 모래톱이나 칼날진 해풍쯤에

그대 마음의 뻗센 잡초 베어질 리 만무했지만

어쩌면 서해 일몰 속에 활활 타올라

화전이라도 다시 일굴 줄 알았지

우리 기차와 버스를 번갈아 타며 부산떨었는데

갯벌 기어가듯 느리고 더딘 행려

내 급한 생각만이 솟구치는 물결을 타고

지도책에서 배운 산동반도까지 헤엄쳐갔을 뿐

정작 그대는 서해로 질러가는 길을 피해

왜 자꾸 멀리멀리 돌아서 가자 했을까

서해, 죽은 바다와 황사바람 속에서

바닷새 몇 마리 사람 기척에 질려 있었지

기억해? 붉은 노을이 그대 뺨에 젖어 내리는 동안

가슴엔 듯 둔탁하게 자갈 굴러가던 것을

그대를 넘어 바다로 가는 길은 멀고멀어서

내 지친 목측 서둘러 침몰시키던 것을

그대 기억해? 오랜 세월 지나

일구어낼 마음밭 없어 황량해질 때마다

나 또한 그대 더딘 발걸음을 곰곰 헤아리듯이

 

 


 

강연호(姜鍊鎬, 1962년 ~ ) 시인

1962년 대전 출생. 고려대학교 국문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했으며, 현재 현재 원광대학교 한국어문학부 교수로 재직중. 1991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歲寒圖〉외 아홉 편이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 1995년 제1회 현대시동인상 수상. 시집《비단길》(세계사, 1994), 《잘못 든 길이 지도를 만든다》(문학세계사, 1995), 《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문학동네, 2001), 《기억의 못갖춘마디》(문예중앙,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