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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강연호 시인 / 울음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6. 29.

강연호 시인 / 울음

 

 

새벽 두 시인데 아니 세 시인가

어디선가 희미하게 끈질긴 울음처럼 우는

전화벨, 아무도 받지 않는다 벽을 타고

수도관을 타고 화장실의 통풍구를 타고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타고 전화벨이 오르내린다

 

나는 돌아눕지만 전화벨은

돌아눕지 않을 작정인 듯 열두번도 더 운다

제발 좀 받아라, 얘기라도 들어봐라

받아줄 수 없는 어떤 사연이 더 절절한지도 모르는데

어떻든 나는 다시 잠들고 싶다

 

한참을 울다 겨우 찾아드는 전화벨

그 뒤끝을 채며 이제는 거실의 냉장고가 운다

시계바늘이 운다 보일러가 운다

한 아이가 우니까 다른 아이가 운다 다들 따라 운다

울음은 전염병이다, 커다란 악기의 공명통처럼

온 아파트가 덩달아 온 도시가 끈질긴 울음을 운다

 

그 속에서도 악착같이 잠을 청하는 나

나란 놈이 싫어지는 밤이다

 

《현대시학》2004년 6월호

 

 


 

 

강연호 시인 / 월식

 

 

오랜 세월 헤매 다녔지요

세상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그대 찾아

부르튼 생애가 그믐인 듯 저물었지요

누가 그대 가려 놓았는지 야속해서

허구한 날 투정만 늘었답니다

상처는 늘 혼자 처매어야 했기에

끊임없이 따라다니는 흐느낌

내가 우는 울음인 줄 알았구요

 

어찌 짐작이나 했겠어요

그대 가린 건 바로 내 그림자였다니요

그대 언제나 내 뒤에서 울고 있었다니요

 

 


 

 

강연호 시인 / 음악

 

 

그때 음악과 시가 있는한

영원한 청춘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때 우리가 쏘다녔던

골목과 천 변은 빛났던가

아니 한 장의 나뭇잎조차 빛나지 않았다

우리가 빛이었으므로

가슴 근처에 잡히는 멍울은

울음이 아니라 음악이라고 생각했었다

하기는 울음이 곧 음악 아닌 적 있었던가

다만 슬프지도 격렬하지도 않을 뿐이야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래서 우리는 시를 썼고

그래서 한 번도 청춘인 적 없었다

진작부터 붉은 노을이었다

지나가는 말로 묻는 안부처럼

무심한 듯 갑자기 가슴을 치는 것

음악이란 그런 것이다

 

 


 

 

강연호 시인 / 저 별빛

 

 

그리움도 버릇이다 치통처럼 깨어나는 밤

욱신거리는 한밤중에 너에게 쓰는 편지는

필경 지친다 더 이상 감추어둔 패가 없어

자리 털고 일어선 노름꾼처럼

막막히 오줌을 누면 내 삶도 이렇게 방뇨되어

어디론가 흘러갈 만큼만 흐를 것이다

흐르다 말라붙을 것이다 덕지덕지 얼룩진

세월이라기에 옷섶 채 여미기 전에

너에게 쓰는 편지는 필경 구겨버릴 테지만

지금은 삼류 주간지에서도 쓰지 않는 말

넘지 못할 선,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 너에게

가고 싶다 빨래집게로 꾹꾹 눌러놓은

어둠의 둘레 어디쯤 너는 기다리고 있을 테지만

마음은 늘 송사리떼처럼 몰려다니다가

문득 일행을 놓치고 하염없이 두리번거리는 것

 

저 별빛 새벽까지 욱신거릴 것이다

 

 


 

 

강연호 시인 / 저문 길

 

 

사람 기척에 놀라 그만 막다르게 입 다문 길을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게 삼가 열며 걸었습니다

적소 따로 없어 세상의 집들 웅크린 채 잠들고

불 꺼진 창에서 풀풀 새어나온 어둠이

길을 끌어가는 포플라 행렬 흔들어 어지럽혔습니다

아무리 천천히 걸어도 생각은 숨가쁘게 달려가

기억하지 못하는 기억까지 데불고 오곤 하였습니다

혼자서는 작정한 만큼 가지 못할 산책이었을까요

귀찮아도 같이 걷자며 어깨를 치는 시름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지난 시절은 힘겨웠으니

그리 알고 지내라고 이만 줄인다고

밑도 끝도 없는 엽서 한 장 우체통에 넣을 때

가슴 한 쪽이 먼저 둔탁한 소리로 떨어져내렸습니다

바라보면 저기 돌아가 지친 몸 뉘어야 할 거처가

자꾸만 흐릿하게 번지고 있었습니다

 

 


 

 

강연호 시인 / 적멸(寂滅)

 

 

지친 불빛이 저녁을 끌고 온다

찬물에 말아 넘긴 끼니처럼

채 읽지 못한 생각들은 허기지다

그대 이 다음에는 가볍게 만나야지

한때는 수천 번이었을 다짐이 문득 헐거워질 때

홀로 켜지는 불빛, 어떤 그리움도

시선이 닿는 곳까지만 눈부시게 그리운 법이다

그러므로 제 몫의 세월을 건너가는

느려 터진 발걸음을 재촉하지 말자

저 불빛에 붐비는 하루살이들의 생애가

새삼스럽게 하루뿐이라 할지라도

이 밤을 건너가면 다시

그대 눈밑의 그늘이 바로 벼랑이라 하더라도

간절함을 포기하면 세상은 조용해진다

달리 말하자면 이제는 노래나 시 같은 것

그 동안 베껴 썼던 모든 문자들에게

나는 용서를 구해야 한다

혹은 그대의 텅 빈 부재를 채우던

비애마저 사치스러워 더불어 버리면서

 

시집 - 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

 

 


 

강연호(姜鍊鎬, 1962년 ~ ) 시인

1962년 대전 출생. 고려대학교 국문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했으며, 현재 현재 원광대학교 한국어문학부 교수로 재직중. 1991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歲寒圖〉외 아홉 편이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 1995년 제1회 현대시동인상 수상. 시집《비단길》(세계사, 1994), 《잘못 든 길이 지도를 만든다》(문학세계사, 1995), 《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문학동네, 2001), 《기억의 못갖춘마디》(문예중앙,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