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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해철 시인 / 오래 되었네
오래 되었네 꽃 곁에 선 지
오래 되었네 물가에 앉은 지
오래 되었네 산길 걸어 큰 집 간 지
오래 되었네 여럿이서 공놀이 한 지
오래 되었네 사랑해 사랑해 속삭여 본 지
오래 되었네 툇마루에 앉아 한나절을 보낸 지
오래 되었네 아버지 아버지 어머니 어머니 다정하게 불러 본 지
오래 되었네 산 밑 집에서 들을 바라보며 잠든 지
오래 되었네 고요히 있어 본 지
오래 되었네 고요히 고요히 앉아 있어 본 지
나해철 시인 / 웃음소리
명랑한 당신의 웃음소리가 찢어버렸어 도무지 어찌해볼 수 없던 것들을 찢어 부수고 보여주었어 하늘을 푸른 하늘을 시간과 공간이 바람처럼 떠도는 푸르른 하늘로 된 세상을 열어주었어 한 번의 명랑한 당신의 웃음소리가 찢어주었어 내 생의 가면을
나해철 시인 / 집
지친 몸으로 집으로 가자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인다 빛에 떠다니는 작은 먼지와 벽지에 남은 어린 아들의 희미한 그림이 보인다 지친 몸으로 집으로 가자 안 들리던 것들이 들린다 베란다를 지나는 바람과 부엌에서 딸그락거리는 그릇 소리 들린다 지친 몸일 때 집으로 가자 안 보이던 그들이 안 들리던 그들이 눈도 귀도 어루만지며 곁에 와 함께 눕는다
나해철 시인 / 화해를 위하여
새벽이면 이슬에 새들은 부리를 닦고 풀잎들도 정결해진다 외로운 그대 이 땅 어디나 펼쳐진 부드러운 산자락과 푸르른 들판을 보라 곳곳에 희고 허리 굽은 억새로 노동하며 모여 있는 우리를 보아라 그대의 꿈은 이방의 것 그대의 쇠는 모질다 그대는 빛 속에 우리는 뒷전에 있으나 지금 우리는 새벽에 있고 그대는 차라리 어둠에 있다 새벽은 모두가 새로와지는 것 호젓한 능성이 이 땅 한줌 흙으로 태어난 형제여 아교와 같은 어둠을 벗고 이제 돌아오라 헹구어진 얼굴로 잠방이인 채로 황토 묻은 발걸음으로 새벽에 선 우리들 싱그런 가슴으로 오라.
나해철 시인 / 후회
해준 것 없구나 사랑이여 반지도 팔찌도 옷도 구두고 집도 자동차도 해주지 못했구나 그대 목마를 때 한 종지 물만 건네주었구나 그대 눈시울 젖을 때 입술만 대어 닦아주었구나 속절없는 사랑이라는 말만 사랑이라는 말만 들려주고 또 들려주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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