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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나해철 시인 / 오래 되었네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6. 29.

나해철 시인 / 오래 되었네

 

 

오래 되었네

꽃 곁에 선 지

 

오래 되었네

물가에 앉은 지

 

오래 되었네

산길 걸어 큰 집 간 지

 

오래 되었네

여럿이서 공놀이 한 지

 

오래 되었네

사랑해 사랑해 속삭여 본 지

 

오래 되었네

툇마루에 앉아 한나절을 보낸 지

 

오래 되었네

아버지 아버지

어머니 어머니 다정하게 불러 본 지

 

오래 되었네

산 밑 집에서 들을 바라보며 잠든 지

 

오래 되었네

고요히 있어 본 지

 

오래 되었네

고요히 고요히

앉아 있어 본 지

 

 


 

 

나해철 시인 / 웃음소리

 

 

명랑한

당신의 웃음소리가

찢어버렸어

도무지 어찌해볼 수 없던 것들을

찢어 부수고 보여주었어

하늘을

푸른 하늘을

시간과 공간이

바람처럼 떠도는

푸르른 하늘로 된 세상을

열어주었어

한 번의 명랑한

당신의 웃음소리가

찢어주었어

내 생의 가면을

 

 


 

 

나해철 시인 / 집

 

 

지친 몸으로 집으로 가자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인다

빛에 떠다니는 작은 먼지와

벽지에 남은 어린 아들의 희미한

그림이 보인다

지친 몸으로 집으로 가자

안 들리던 것들이 들린다

베란다를 지나는 바람과

부엌에서 딸그락거리는

그릇 소리 들린다

지친 몸일 때 집으로 가자

안 보이던 그들이 안 들리던 그들이

눈도 귀도 어루만지며

곁에 와 함께 눕는다

 

 


 

 

나해철 시인 / 화해를 위하여

 

 

새벽이면 이슬에 새들은 부리를 닦고

풀잎들도 정결해진다

외로운 그대

이 땅 어디나 펼쳐진 부드러운 산자락과

푸르른 들판을 보라

곳곳에 희고 허리 굽은 억새로 노동하며 모여 있는

우리를 보아라

그대의 꿈은 이방의 것

그대의 쇠는 모질다

그대는 빛 속에 우리는 뒷전에 있으나

지금 우리는 새벽에 있고

그대는 차라리 어둠에 있다

새벽은 모두가 새로와지는 것

호젓한 능성이 이 땅 한줌 흙으로 태어난 형제여

아교와 같은 어둠을 벗고

이제 돌아오라

헹구어진 얼굴로

잠방이인 채로 황토 묻은 발걸음으로

새벽에 선 우리들 싱그런 가슴으로 오라.

 

 


 

 

나해철 시인 / 후회

 

 

해준 것 없구나

사랑이여

반지도 팔찌도

옷도 구두고

집도 자동차도

해주지 못했구나

그대 목마를 때

한 종지 물만 건네주었구나

그대 눈시울 젖을 때

입술만 대어 닦아주었구나

속절없는

사랑이라는 말만

사랑이라는 말만

들려주고 또 들려주었구나

 

 


 

나해철 시인

1956년 전남 나주 영산포 출생. 전남대 의대 및 동대학원을 졸업. 의학박사.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영산포」가 당선되어 등단. 1984년 첫시집 『무등에 올라』 간행 이후, 『동해일기』 『그대를 부르는 순간만 꽃이 되는』 『아름다운 손』 『긴 사랑』 등이 있음. 현재 〈오월시〉 동인으로 활동 중. 현재 나해철성형외과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