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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지향 시인 / 공간 밖 공간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6. 29.

김지향 시인 / 공간 밖 공간

 

 

휙 휙 시간이 달아난다 어디로 가는 거지

궁금한 나는 시간의 손을 끌어 잡는다

잽싸게 뿌리치고 달아나는 비밀 같은 시간

나는 온 힘을 모아 시간의 꽁지를 끌어당긴다

시간은 공간 밖 공간의 레일 위로 훌쩍 몸을 빼 돌린다

나도 잽싸게 마우스를 잡고 공간 밖 공간의 나라로

함께 동댕이쳐 진다

이미 이사 온 사람들로 배불뚝이 된 공간 밖 세상

초만원의 공간마다 금이 찍 찌익 나 있다

누가 만들어 공간 밖 공간의 개찰구로

사람들을 밀어 넣었는지

한꺼번에 밧줄 같은 길들이 살아나 얽히고

한꺼번에 박음질이 잘 된 방들이 환하게 불을 켜

어린 복제인간들의 눈을 밝혀주고

한꺼번에 닮은꼴의 아이들이 지상엔 없는 속력을 만들어

까불까불 콩새 꼬리 같은 서버를 타고 둥둥 떠다니고

한꺼번에 구문이 안 맞는 낯선 말들을 만들어

사방천지 아무데나 낭자하게 팡 팡 쏟아놓는다

 

남은 지상 사람들아,

공간 밖 공간을 쳐다봐라

새로 돋은 새 풀처럼 톡 톡 머리들이 튀어나와 있지!

겉옷을 벗어둔 지상은 이미 눈동자 빠진 허공일 뿐

내일이면 없어질 구멍 뚫린 항아리일 뿐

그래도 남은 사람들은 수명 다한 낡은 잡기장 같은

지상을 사랑한다 죽도록 사랑하며 떠나간 사람들을 기다린다

또 다시 생기발랄한 세상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김지향 시인 / 공간 밖 공간에도 봄이 살아난다

 

 

어제는 사이트와 사이트 사이를 마구잡이로 들락거린 세상소리를 마셨다

오늘은 모두가 한꺼번에 세상소리로 뒤엉켜 고속 메일이 되어 온 세상에

흩어진다 삶을 짜서 널어놓은 빨랫줄 밑에서 뚝 뚝 떨어지는 삶의 옹아리를

받아먹은 씨앗들을 마우스에 담아 나는 수평선 저 쪽 가물거리는 안개나라에

보낸다 안개는 없어지고 파란 풀밭이 태어난다 풀밭 속에서 살살 풀리는

햇살을 등에 업고 새파란 바람을 받아먹는 병아리 떼, 놋쇠 자물통 아이디를

훔쳐 열고 쫓아 나온 성급한 노란 병아리 몇 개비 꽃 대궁에 끼워져 서로

팔짱을 걸고 노란 꽃으로 피어난다

 

사이트와 사이트 사이 줄다리기하는 고속 안테나 위에서

누가 먼저 정보를 빼앗나 싸움판을 벌이는 마우스의 숨 가쁜 속력을 타고

금빛 날개를 파닥거리는 본적도 없는 낯선 메일들이 내게도 와락 달려든다

가장 먼저 받은 이름 없는 메일을 연다 날개를 편 봄이 내려 선

공간 밖 공간의 성 베네딕트 수도원 뜰 잔디밭에 쫑 쫑 쫑 뛰어가는

방금 마악 배꼽 떨어진 봄을 한 입 가득 따 넣은 메일, 나는 숨차게

따라가며 봄 꼭지를 톡 따고 빠뜨린 꼭지도 톡 딴다.

 

세상은 온통 샛노란 물감 통에 빠져 진저리를 친다.

 

 


 

 

김지향 시인 / 공중창고에서

 

 

공중창고에 갇히면 나가지 못함

활주로가 녹이슬어?

아니 시체로 귀환할까 봐?

 

삼십년 전에도 그랬었지

공중을 도려내 보이는 분화구마다

지상의 배기가스가 터져나오고

군데군데 열려있는 공기통은

뚱뚱 부어 손톱자국도 남지 않았지

우리는 소리쳤지

밟을 때 마다 딱딱 발이 맞힌다고

공중에 갇혀서 우리는 비명을 지르며

복막염 앓는 공기를 살려내라고

전능자에게 비명을 쏘아올렸지

우주공간을 빙빙 돌며

전능자가 있을 끝과 끝을

두 주먹으로 땅,땅, 두들겼지

 

그로부터 대심판날인줄 알고 사는 우리

오늘도 심판날인줄 아는 우리

복막염 공기는 때때로 배에서 산성비를 뽑아내고

비닐 주머니도 없는 우리는

거짓말장이, 사기꾼! 하고

누군가를 향해 소리를 치지만

공기가 살아난다고

전능자가 손을 내밀리라고

믿었던 우리는 오늘도 우리 자신의

희망에게 배반당한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살아있다

시체로 귀환하지 않고

활주로가 떨어져나간

공중창고에서

 

아직도 시체가 되지 않고 있음

 

 


 

 

김지향 시인 / 굴렁쇠와 아이

 

 

안녕!

바람도 한 옆으로 밀쳐 세워놓고

쨍쨍한 햇빛 속을 날마다 보는

아이 하나 손을 파랗게 흔들며 간다

처음엔

숨죽인 운동장 머리에

삐뚤삐뚤 서투른 팽이치기처럼

바퀴가 푸득거렸다

아이의 새파란 손가락에 걸린 새파란 시간이

밀쳐놓은 바람을 흔들어 운동장 전체를 띄웠다

와~와~와~ 운동장으로 뛰어든

사람의, 빌딩의, 공장의, 창문의, 손뼉소리가

귀먹은 시간의 귀속까지 요동쳤다

중간엔

팔딱이는 운동장 심장부를 뛰는

아이보다 큰 덩치의 굴렁쇠에 성미 급한

젊은 시간이 고무줄처럼 튕겨 올라붙었다

올라붙은 시간이 심술을 부렸다

검은 보자기를 공중에 펼쳐 햇빛을 걷어냈다

공중은 문득 뚜껑열린 물병이 되었다

뚝뚝 떨어지던 물방울이 소나기로 몸 바꾸는 순간

굴렁쇠에 무너지는 보드불럭 담장이 걸리고

굴렁쇠에 쓰러지는 공장 굴뚝이 걸리고

굴렁쇠에 달려가는 사물의 아우성이 걸리고

굴렁쇠에 흙탕물을 몰아오는 바람 갈퀴가 걸리고…

나중엔

손을 흔드는 아이의 손등이

주름 깊은 어둠덩이를 밀고

노을 감긴 운동장 하복부를 마악 돌아

얽힌 실타래를 온몸으로 풀어내듯

은빛의 시간을 나부끼며 느긋하게 간다

 

내가나를 밀고 나간다 운동장 밖으로

안녕!

 

 


 

 

김지향 시인 / 궤도 이탈중

 

 

그는 이제 문을 나선다

몸의 마디마디 문을 열어놓고

바람의 머리채를 휘어잡아 몸 전체를

지퍼 속에 집어넣는다

그의 팔다리는 풍선처럼 살아나 퍼득인다

 

걸어보지 않았던 길들이 모두 목을 쳐들고

인사도 없이 그에게 달려든다

 

인터넷 속에서 한두 번 만났던 사물들이

저들끼리 모였다 흩어졌다 그림을 만들며

눈썹 밑으로 지나가고

발자국 소리도 없는 사람들이

낯선 소리를 내며 그림 속으로 스르륵

빨려들어간다

그림들은 커졌다 작아졌다

푸르렀다 하얗게 바래지며

지상의 저물녘 들판으로 돌아간다

 

호주머니처럼 열린 입으로 연방

감탄사를 게우며 그는

멈추지 않은 지상의 삶을 벗어두고

저물녘의 기차 꼬리 짬에서

지나온 길들을 지퍼 속에 구겨 넣으며

터널같은 세상 한 비퀴 돌아

지금 마악 궤도 밖으로 사라져가는 중이다

 

 


 

 

김지향 시인 / 그 해 여름 숲 속에서

 

 

이른 아침 산을 오른다

 

아직 바람은 나무를 베고 잔다

동쪽 하늘에 붉은 망사 천을 깔던 해가 숲을 깨운다

숲은 밤새 바람에게 내준 무릎을 슬그머니 빼낸다

베개 빠진 바람머리 나뭇가지에 머리채 들려나온다

 

잠 깬 산새 몇 마리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그네를 뛰는 사이 숲들이 바람뭉치를 머리 위에 올려놓고

북채가 된 가지로 산새의 노래를 바람 배에 쏟아 부으며

탬버린이 된 바람 배를 치느라 부산떤다

 

입 다물 줄 모르는 가지가 종일 바람바퀴를 굴린다

숲 속은 온종일 탬버린 소리로 탱탱 살이 찐다

세상을 때려주고 싶은 사람들은 왼쪽에서 오른 쪽으로

아래서 위로 숲을 안고 돌며 바람바퀴를 굴리는

숲의 재주를 배우느라 여름 한 철을 숲에서 산다

 

 


 

김지향(佑堂 金芝鄕) 시인

1938년에 일본 규수에서 출생. 그후 경상남도 김해와 양산에 정착하여 성장. 6.25후 홍익대학교 국어국문학를 졸업, 단국대에서 문학석사와 서울여자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 시집「병실」「막간풍경」「사육제」등 25권과 시선집「살아서 노래하는 강물」「바람이 돌아온다」「김지향 99선」「김지향 시선집」, 에세이집「바람과 연기」외 다수, 시론집「한국현대여성시인연구」외 학술 논문 20여편과 화갑기념문집「내일에게 주는 안부」, 50년 기념문집「김지향의 시세계」「나뭇잎이 시를 쓴다」등 많은 저서를 펴냄. 단국대, 홍익대, 한세대 등에서 국문학을 가르쳤고 한양여대 문창과 교수. 시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박인환문학상, 윤동주문학상, 한국시인정신상, 한국민족문학대상 등 많은 문학상 등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