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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호 시인 / 절벽은 절박하다
여기서 길을 버리면 어떡하냐는 내 건짜증만으로도 절벽은 무너질 기세로 콜록거렸다 침묵이란 사실 이런 거 아니냐는 듯 울컥 명치 끝에 걸린 멀미 넘어오지 않고 바람은 마음 속에서만 소용돌이쳤다 저기 위태로운 칡덩굴 하나 목숨 건 곡예 부려 바위를 쪼개는데 아, 진짜 침묵은 말 없어도 바위를 쪼갠다는 걸 몸으로 보여주고 있는데 얼마나 많은 날들 더 지나야 내 들끓는 욕망은 투신할 수 있을까 언젠가는 말 없는 사내 될 거라며 두 주먹 불끈 쥐어보지만 늘 그렇듯이 세월은 지나간 세월만 세월이고 너무 지루하고 아무도 기다려주지 않고 늘 그렇듯이 지금쯤은 침묵해야 한다고 다짐할 때마다 절벽 앞에 선 기분이고 절벽은 그래서 언제나 절박하다
강연호 시인 / 제기동 블루스1
이깐 어둠쯤이야 돌멩이 몇 개로 후익 갈라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막막한 날들이 제기천 썩은 물처럼 고일 때마다 내가 야심껏 던져 넣은 돌멩이들은 지금 어느만큼의 동그라미를 물결 속에 키웠는지 헛된 헤아림 헛된 취기 못 이겨 걸음마다 물음표를 찍곤 하던 귀가길 자취방 문을 열면 저도 역시 혼자라고 툴툴거리다 지친 식빵 조각이 흩어진 머리칼과 함께 씹히곤 하였다 제기동, 한 집 건너 두 집 건너 하숙과 자취에 익숙했던 한양 유학 동기생들은 이미 모두 떠났지만 도무지 건방졌던 수업시대 못난 반성 때문인지 졸업 후에도 나는 마냥 죽치고 있었다 비듬 같은 페퍼포그와 도서관 늦은 불빛도 그리워하다 보면 이깐 어둠쯤이야 싶었던 객기보다 시대의 아픔이란 게 다만 지리멸렬했다 그런그런 자책과 앨범뿐인 이삿짐을 꾸려 어디로든 떠나자고 다짐했을 때 그동안 키운 야심의 동그라미들 흔적 없는 제기천 흐린 물결 속으로 내가 마지막으로 던져 넣은 건 채 부벼 끄지 못한 담뱃불이 고작이었다
강연호 시인 / 지긋지긋이 지극하다
지긋지긋한 게 어디 세끼 밥 먹는 일뿐이랴 다들 별고 없다는 안부조차 지긋지긋해질 때 세상은 어디 국경이라도 넘어보라는 듯 고요하다, 쓸 만한 사람은 죄다 넘어갔다던 시절이 있었지 쓸 만해서 그들이 넘어간 게 아니라 넘어가서 쓸 만해진 것 아닐까 지긋지긋하다는 것은 간절하다는 것 깊은 고요는 못 이룬 열망을 감추고 있다 세월은 여전히 고봉밥처럼 지긋지긋을 퍼 담겠지만 비손은 부질없어야 더욱 빛나는 법이다 간절한 비손이 허드렛물을 정화수로 바꾸듯이 지긋지긋이 모여 삶은 지극해진다 모월모일 어디 국경이라도 넘어보라는 고요 속 삼가 지긋지긋한 밥심으로 쓴다
지긋지긋이 지극하다
『기억의 못갖춘마디』 , 강연호, 문예중앙, 2012년
강연호 시인 / 진주
조개 속에서 큼직한 진주가 나왔다 온 내장을 다 동원하여 이물질과 싸웠는지 기진맥진한 듯 조개는 제 몸을 순순히 열어주었다 저건 티눈이나 옹이가 아니다 악성 중에서도 가장 악질적인 종양인데 그 상처와 싸우느라 얼마나 아팠을까 그걸 사람들은 귀하다고 한마디씩 주절대다니
처절하게 빛나는 상처에 입 맞추며 사람들은 진주를 경배한다 경배의 이유는 물론 딴 데 있지만
강연호 시인 / 첫눈
죽은 자의 빈집에 산 자들이 다들 모여 왁자지껄 신이 난다
이렇게 죽고 싶지는 않았는데 평생 웃음이 없던 그가 영정 속에서 웃고 있다
첫눈이, 아 첫눈이 조등을 적시며 밤새 내릴 기세다
이 세상의 눈은 모두 첫눈인 듯 반갑고 이 세상의 사랑은 모두 첫사랑인 듯 그립고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았는데 평생 울고 싶었던 그는 왜 죽자고 웃고 있는가
그럼 울어 첫눈인데 우아한 용서는 첫눈이 다 한다
정말 이 세상의 죽음은 모두 첫 죽음인데 초상집의 소주는 왜 이리 늘 달디단가
산 자들은 저마다 살 궁리에 바빠 돌아가고 죽어 빈집을 나온 그는 노숙이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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