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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지향 시인 / 그대 향기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6. 30.

김지향 시인 / 그대 향기

 

 

상수리 나뭇잎에

우레소리를 몰고 와 바람이 앉는다

상수리나무는 깊은 잠을 버리고

엷은 안개를 게우며 일어난다

그림자도 같이 어둠도 같이

바람 속으로 숨는

상수리 밭은 소용돌이치는 소리의 강이 된다

세력 있는 강의 소용돌이 틈에서

더욱 싱그럽게 더욱 뜨겁게

그대 향기 그대 노래

오늘은 분수로 솟아올라라

솟아올라 어둠을 지워버려라

 

 


 

 

김지향 시인 / 그리다만 가을 한 장

 

 

까슬까슬 빛이 바스러지는 가을엔 바람도 빌딩 꼭지에 꽁지를 내려놓고

쉰다

몸이 싸늘한 바람을 기다리는 나무마다 지름길로 온 따끈거리는

햇볕의 불 주사에 따끔따끔 이마가 빨갛게

익는다

고루 박힌 이빨을 죄다 내놓고 노랗게 웃는

옥수수 머리칼도 붉게 볶여

곱슬거린다

도토리 키 재기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발꿈치를 쳐들고 있는 고추밭,

진다홍 손가락을 대롱거리는 탱탱한 고추송이에 탁, 탁, 날개를 치며

고추잠자리 떼 앉을까 말까 망설이는

중이다

건너편 사과밭 사과나무엔 공들여 키운 아기의 발그레한 뺨을

쓰다듬는 거치른 손의 어머니가

살고 있다

이제 곧 가을 공간을 청소할 싸늘한 바람이 몸을 일으켜

그리다만 삽화 한 장 걷어내 화덕으로, 곳간으로 보낼

키를 들고 총총히 달려올 차례만

남았다

 

 


 

 

김지향 시인 / 그림자의 뒷모습

 

 

그 때

알 수 없는 한 그림자와

마주 서서

줄다리기를 하면서

나는 그에게 자꾸 끌려가고 있었다

 

그림자는 밤에만 다녔다

그림자가 자고 있을 때

아침이 오지만 그림자는 자지 않으므로

아침은 창 밖에 서 있었다

 

밤은 가고 또 와도

그림자는 죽지 않았다

무성하게 머리털까지 자라나

내 키를 덮었다

나는 그림자의 갈퀴에 쓸려 내려갔다

앗질앗질 땅 아래로 떨어져 내려

마침내 밑바닥에 닿았다

그때였다

어디서 날카로운 한 줄의 빛이

새들어와

 

그림자를 쏘았다

머리털 갈퀴도 수염도 쏘았다

 

아, 나는 죽음을 이끌고 나가는

그림자의 뒷모습을 보았고

그리고 이겨 버렸다

비로소

나의 창안엔 아침이 왔다

 

 


 

 

김지향 시인 / 기차가 온다

 

 

그해 겨울 나는 정동진 새벽 바닷가 모래 위에 서 있었다 꽁꽁 얼어붙은 시간과 시간 사이 서너 꼭지의 남자와 여자가 안개를 신고 희미하게 서성거렸다 동쪽 산꼭대기에 박힌 한 여자의 눈이 비명을 질렀다 ‘모래시계가 얼어붙었다’ 여자의 어깨 위로 한 뼘쯤 더 긴 남자의 고개가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그때 동쪽 산마루 밑에서 볼그레한 저고리만 벗어 올릴 뿐 해는 아직 머리칼 한 올 보여주지 않았다 성미 급한 남자가 둑 위에 얼어붙은 돌멩이를 차 던지다 그 자리에서 깨금발로 뛰었다 엄숙하고 신비한 우주의 송신음을 기다리듯 나는 오그라든 목으로 우주의 옆구리에 얼어붙었다 바로 그때 둑 위의 남자가 와~와~와~ 소리 질렀다 멀리 발치께의 수평선이 빨갛게 끓어올랐다 점점 몸 부피를 넓혀갔다 문득 바다 배꼽에서 새빨간 모닥불이 물너울에 스르륵 말리고 있었다 나도 겁결에 돌멩이를 던졌다 모닥불은 얼룩도 지지 않고 활짝 웃고 있는 장미다발로 커다랗게 피어올랐다 바로 내 이마 위로 뜨끔거리는 빛이 흐르고 온몸이 얼음에서 풀려났다 얼음이 빠져나간 여자들은 다리가 후들거리는지 모두 주저앉았다 해는 점점 작아지면서 사람의 정신을 빼앗아 달고 부지런히 공간 밖으로 가고 있었다 나도 해를 따라 부지런히 걸었다 아침공기를 부수고 햇살을 쪼개며 희뿌연 공간 한가운데로 기차가 달려오고 있었다 잠자는 둑 목에 찢어지는 기침소리를 질러 넣으며 정신 나간 사람들 정신의 복판을 가로질러 기차가 와락 달려들고 있었다

 

 


 

 

김지향 시인 / 기차를 타고

 

 

내가 탄 급행열차는 가지 않는다

가지 않는 열차에서 눈이

사물 1.2.3을 먹는다

햇빛은 덩그렇게 나를 켜고 따라온다

가로수가 눈 속으로 들어왔다 나간다

열차는 가만히 서서 가로수를 파먹는다

개망초꽃이 밟히지 않으려고

뒷절음질쳐 궁둥이로 들어와 이마로 나간다

열차는 서서 창문으로 스르륵 뭉개버린다

무리 소나무가 누렇게 뜬 어깨쭉지를 디밀어본다

열차는 서서 발통으로 깔아뭉갠다

밭이랑이 줄을 그으며 달려들었다 짓뭉개진다

논바닥이 찰랑찰랑 물장구를 치며 들어왔다

열차 눈에 물먹이고 지워진다

지우개를 달고 서있는 열차를 타고 내 눈은

사물 1.2.3을 먹고도 눈물 한 방울 내놓지 않는다

 

마음은 어디에 벗어두고 눈만 기차를 타고

다 뭉개진 금수강산을 보러가다니!

 

 


 

 

김지향 시인 / 길이 길을 버리다

 

 

현관을 나선다

길이 길의 몸속에 내 발을 꽂아준다

“빨리 내 몸을 밟고 건너가 봐, 시간이 없어‘

길이 선심을 쓰듯 내 발을 밀어 던진다

나는 길에 튕겨진다

발이 큰 나는 길에 담겨지지 않는다

되튕겨져 나와 나는 길을 구경한다

시간을 앞질러 달려가는 길머리가 없어진다

나는 눈을 감았다 떴다 반복한다

반복에 반복을 해도 길 머리는 살아 나오지 않는다

‘이런 , 길이 길을 버리다니!’

 

나도 길을 버린다

길이 나를 버리기 전에

길이 만들어놓은 난삽한 길을 먼저 버린 나는

튕겨져 나와 길 밖에서 길 밖을 꿰뚫어 본다

갈래 갈래로 땅이 쪼개지고 있다

땅은 쪼개지는 대로 길이 된다

 

길 밖의 길로 내가 가고 있다

오만개의 내가 오만개의 길로 가고 있다

잔뜩 몸을 부풀린 짐차는 짐차의 길로 정면돌파 하고

잔뜩 몸을 움cm린 승용차는 승용차의 길로 정면돌진 하고

나는 내가 만든 나의 길로 정면통과 한다

만일 내가 나의 길을 만들지 않았다면

오욕칠정의 나의 분신들은 지금 어디로

빙글빙글 우회할지

아찔, 현기증이 나를 관통하고 지나간다

 

 


 

김지향(佑堂 金芝鄕) 시인

1938년에 일본 규수에서 출생. 그후 경상남도 김해와 양산에 정착하여 성장. 6.25후 홍익대학교 국어국문학를 졸업, 단국대에서 문학석사와 서울여자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 시집「병실」「막간풍경」「사육제」등 25권과 시선집「살아서 노래하는 강물」「바람이 돌아온다」「김지향 99선」「김지향 시선집」, 에세이집「바람과 연기」외 다수, 시론집「한국현대여성시인연구」외 학술 논문 20여편과 화갑기념문집「내일에게 주는 안부」, 50년 기념문집「김지향의 시세계」「나뭇잎이 시를 쓴다」등 많은 저서를 펴냄. 단국대, 홍익대, 한세대 등에서 국문학을 가르쳤고 한양여대 문창과 교수. 시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박인환문학상, 윤동주문학상, 한국시인정신상, 한국민족문학대상 등 많은 문학상 등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