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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호 시인 / 폐가
이 집에서 마지막으로 밝힌 불빛은 근조등이었다고 한다 나는 부의금도 없이 이곳에 왔으므로 슬픔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너무 늦었다는 생각도 없다 대체로 인사치레의 조문이 아니라면 상가에서 정작 만나고 싶은 사람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사람인 것이다 죽은 사람이 그저 죽은 사람이듯 떠난 식솔들 역시 기다리지 않았으리라 한때 이곳에 쥔 붙였던 육신을 따라 빈집은 흙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다 창살과 문설주가 아직 버티는 것은 한꺼번에 무너지기 위한 악다구니일 뿐 햇살이 빈집의 서까래를 들쑤신다 언젠가는 저 햇살의 무게조차 견디지 못해 폭삭 주저앉고야 말 것이다 나는 곡비가 아니어서 울지 않는 게 아니다 어떤 숨죽인 물음도 헛되이 빈집은 녹슨 못처럼 고요를 구부러뜨린다 나는 다만 밥 짓는 냄새를 그리워하는 것으로 간곡한 예를 올리고 돌아설 뿐이다
강연호 시인 / 행복
이제는 행복해졌느냐는 안부가 그에게 온다 혓바늘이라도 일 것 같은 저녁의 비애 속으로 뚝뚝 떨어지는 질문의 풍경 행복? 그가 낮게 되뇌여 보는 입술의 움직임을 귀청이 따라가다 포기한다 별들이 빛나 보이는 건 멀리 있기 때문일까 멀리서는 그 역시 빛나 보일까 생각은 삼십 촉 알전구보다 길게 그늘을 드리우고 한때는 그에게도 서늘한 추억이었을 연애나 정열 같은 것들이 읽다 놓친 신문의 부고란 같이 싸늘하다 기를 쓰고 행복해지고 싶었고 어쩔 수 없이 행복해져야 했지만 그는 안부가 숨겨놓은 행간이 문득 궁금해진다 세월은 늘 너그럽지 않았다고 자책인지 불화인지 뚜렷하지 않은 날숨이 터진다 행복이라는 낱말 근처에는 그의 눈시울을 적시는 무엇인가가 어려 있다 그는 이제 주간지의 현란한 고백처럼 텅 빈다
강연호 시인 / 허구한 날 지나간 날
아무도 오지 않는다 허구한 날 내 마음의 공터에는 혼자 놀다 심심해진 햇살 곰곰한 생각에 지쳐 그늘 키우고 기다리는 일 많으면 사람 버리기 십상이라며 귓바퀴에 잠시 머물던 바람결 총총히 사라진다.
저 햇살 저 바람도 저녁이면 돌아갈 집이 있는가 고개 갸우뚱하면 침착하게 낙법을 연습하던 나뭇잎 몇 장 내일 또 오마는 약속처럼 어깨에 얹힌다
삶이란 이런 거다 건너편 아파트 베란다에 널렸다 걷히면서 다시 더러워질 결심을 바투 여미는 흰 빨래의 반짝임 같은
세월아, 갈기갈기 찢기고 늘어진 하품에 지쳐 나는 너에게 줄 그리움이 없는데 너는 손 벌리고 자꾸만 손 벌리고 사진틀 속에 흑백으로 갇힌 날들이 파닥거린다
더러 지나간 날들이 예쁘게 이마 짚어주지만 아무리 기억의 초인종을 신나게 눌러도 그때, 그 들길, 첫 입맞춤 풀잎 풀잎 풀잎, 서걱서걱 서투르다며 흉보던 날들은 이제 더 이상 여기에 살지 않는다 텅 빈 우편함에는 수취인 불명의 먼지만 쌓여갈 뿐
내 한 번도 같이 놀자고 한 적 없는 세월아, 내가 언제 숨바꼭질하자 했니? 그것도 모자라서 세월아 왜 나만 술래 되어야 하니?
강연호 시인 / 환승역
지하철 환승역, 갈아타는 것은 근사한 일이다 기차든 비행기든 직장이든 혹은 여자든 갈아타는 것만큼 가슴 뛰는 일은 없다 환승역에는 어디나 미로가 있고 종말론이 있고 복권이 있다 삶은 문득 놓친 실끝 같은 거니까 삶은 언제나 끝장내고 싶은 거니까 삶은 늘 가려운 거니까 환승역에는 어디나 미로가 있고 종말론이 있고 복권이 있어서 사람들은 더러 이쪽 저쪽 헤매기도 하고 열차에 받혀 공중들리기도 하고 열심히 긁어대기도 한다 사람들은 날마다 환승역에 복작복작 모여들지만 갈아탄다고 세상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강연호 시인 / 흔적
새가 날아가자 나뭇가지 부러졌네 바람 한 점 없었는데 한참 뒤에 문득 생각난 듯이 부러졌네 모든 게 흔적이네 무수한 나무들 중에 그 나무를 무수한 나뭇가지들 중에 그 가지를 선택하고 선택받은 운명의 흔적이네
새가 앉았다 날아간 자리 새는 날아가도 흔적은 남네 그 여운 고스란히 견뎌내려고 조금도 흔들리지 않으려고 용쓰다가, 용쓰……다가 나뭇가지 기어이 부러졌네 흔적의 무게 견디지 못했네
흔적은 결코 지워지지 않네 날이 갈수록 흔적은 무게를 더하네 아무도 흔적을 지탱하진 못하네 이 정도 흔적의 무게쯤 너끈히 견딜 수 있다고 큰소리치던 시절 내게도 있었네, 아니 정말 있었나? 잘 모르겠네 기억나지 않네 그것 역시 흔적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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