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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지향 시인 / 길이 된 꽃잎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7. 1.

김지향 시인 / 길이 된 꽃잎

 

 

꽃샘바람이 얼굴을 가리고 도둑처럼 쳐들어온다

꽃은 제 몸을 나뭇가지에 철사줄로 꽁꽁 묶었지만

찢어진 비망록처럼 부욱, 찢겨진다

 

나무는 제 몸에서 걸어나간 꽃을 보며

뚝,뚝 눈물을 떨군다

무거운 고요가 눈물 위에 떨어진다

 

옷깃 속에 목을 접어넣은 사람들은

나무의 눈물로 돋아난 새 풀을 못 본 채

마구 짓밟고 간다

 

신명이 난 바람이 입에 면도칼을 달고

뾰족뾰족 밖으로 내민 꽃의 희망을

줄을 긋듯 주루룩 삭발시킨다

 

봄들어 속력을 내는 시간을 따라

나무는 꽃잎을 연거푸 토해내고

바람은 연거푸 면도칼로 꽃머리를 부러뜨린다

 

개나리, 진달래, 목련, 벚꽃, 후레지아

부러져 길이 된 꽃의 희망을

한 아름 품어 안고 나는 한바탕

시샘하는 꽃샘바람과 열전을 벌인다

 

 


 

 

김지향 시인 / 깊은 밤

 

 

별이 꽃밭에 떨어졌다 나는

꽃밭을 한 삽 떠서 마당 가운데

던져 넣었다 마당 전체를 빛이 들고 있다

나는 빛을 손바닥에 퍼 담았다 새나가지 않도록

주먹을 꼭 쥐고 어둠을 넘어와 내 책상 꽃병에 꽂았다

빛은 꽂히지 않았다 꽃밭에도 빛은 한 개도 뜨지 않았다

 

시간은 시간을 잡아먹으며 어둠 속으로 힘껏 떠나간다

사람도 떠나가고 아파트도 떠나가고 길도 가로수도

모두 어둠 속으로 떠나간다 꿈을 담는 그릇은

꿈들을 털어내고 낡아가는 헌것 채 한 개비씩

어둠에게 끌려간다 시간은 죽어가는 헌것들을

어둠에게 넘기느라 죽을 시간도 없다고

투덜댄다 투덜대며 죽어간다

 

 

(새로 피어날 내일의 스펙터클 꿈을 새로 만들며)

방문을 닫은 깊은 밤이 내 가슴속 우주에도 가득 깔렸다

 

 


 

 

김지향 시인 / 꽃잎의 귀

 

 

꽃밭이 있는 고층 아파트 발코니로 이사 온

매 발톱 꽃나무 몇 날은 기가 빠진 듯 졸다

오늘 문득 높은 공기를 맛본 듯

고개를 쳐들고 팔팔 일어나고 있다

 

쫑긋쫑긋 귀를 세우고 사람 쪽으로

목을 내밀어 흐드러진 세상 소리를 연거푸 퍼먹는다

너무 많은 세상 소리를 뼈째로 허겁지겁 집어삼킨다

 

말이 내뱉는 가시를 소금물로 알고 들이킨 꽃의 귓불엔

오늘 아침 유리조각들이 매 발톱처럼 뾰족뾰족 매달려 있네

 

 


 

 

김지향 시인 / 꿈 혹은 풀밭

 

 

해꼬리를 잡고

삼백 몇 날을 걸어도

보이지 않네

 

어딘가에 펼쳐져 있을

꿈에만 나타난 풀밭

빛살이 반질거리는 풀밭

장다리꽃이 안개밭으로 뜬

머리위 풍경처럼 걸려서

가늘가늘 숨 죽이고

날개만 떨던 바람이

내 목으로 알싸한 꽃물을

내려보내던 풀밭

숯 많은 풀잎의 귀밑머리 자르며

하늘하늘 살 비비며 마구 짓이기며

바람이 능멸을 해도

아픈 표정 하나 없이

포근한 가슴 열어주던 풀밭

꿈 깨고 나면

보이지 않네

 

육체를 벗은 꿈에만

가벼운 발이

담장위로 치뻗은 풀의 머리를

으깨고 가는 꿈에만

어머니처럼 껴안아 주던 풀밭,

나는 먼 훗날에도 피어날

삶의 꽃씨 한 톨 심어놓고

발병나게 찾아갔지만 어느 날

내리쬐는 햇빛 속에서

잠깨고 나니 갈 수 없네

 

꿈마저 잃어버린 나는

오늘 대문을 박차고 나가서

지상의 길을 종일토록 헤맨다

휘청휘청 내 키가 꼬부라져 접히도록

달려가는 시간의 뒤통수도 보이지 않도록

삼백몇날을 헤매고 다녀도

꿈에 본 풀밭은 나오지 않네

때때로 잡동사니 화물차만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가는,

발에 먼지만 진흙처럼 쌓여가는

금지구역이 많은 널따란 철조망 속

내 발이 닿는 곳마다

철조망이 옭아매는 그런 땅만 있네

아, 지상의 삶은 철조망과 진흙

바로 그것이네

 

길 모퉁이 저 혼자

웃다 울다 하는

외톨이 꽃 한송이의 외로움도

나만 같은

이 삶 속에선

풀밭은 안 보이고

진흙밭에 깊이 박혀

빠지지 않는 내 발자국의 아픔만이

지나간 시간의 증인이 되네

 

 


 

 

김지향 시인 / 나뭇가지에 매맞는 바람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든다고 어젯밤까지

바람을 따라가던 나는 말했다

 

바람은 곁에서 힘없이 부러져 있지만

나뭇가지가 바람을 멀리 내쫓고 있지만

나뭇가지엔 불끈불끈 불뚝힘이 출렁이고 있지만

 

바람이 나뭇가지를 낚아채어

홀랑,몸 벗겨 부끄럽게 한다고 어젯밤까지

나는 분명히 말했다

 

봄이 되면

바람이 달려와서 나뭇가지에

꽃으로 매달린다고

바람꽃이 봄을 피운다고

바람이 아무리 속삭여 주어도

나와도 같이

믿어주지 않는 나뭇가지가

오늘 보니

바람을 마구 때려 패대기치고 있네

패대기 한번에

봄꽃 한 주먹씩 피어나고 있네

바람은 오늘 종일 나뭇가지에 매맞고 있네

 

(생각을 바꾸면 세상이 바뀐다는 말

나는 오늘부터 믿기로 했다.)

 

 


 

 

김지향 시인 / 나뭇잎이 시를 쓴다

 

 

고장 난 시간이 가을 속에 멈춰 섰다

 

세상의 휴게소는 만원을 이루고

들어설 자리가 없는 나는 갓길로 내쫓겼다

길은 바퀴 없이도 잘 굴러 간다

내 앞에 스르륵 미끄러져 온 길이

가득 담은 나뭇잎의 붓끝으로 빨간 시를 쓴다

한 자국도 옮기지 못하는 창백한 내 발등에

마음 아린 나뭇잎이 쯧. 쯧. 쯧. 혀를 차며

나뭇잎 사이사이 초롱꽃처럼 달랑거리는

수은등을 끌어와 불빛 같은 시를 붓는다

 

(가을이 되면 나무들은

온 우주에 시를 쓴다

하늘에다 땅에다 사람의 몸에다

빨간 시를 쓴다)

 

블랙홀에서 불어온 먼지바람에도

돌담 위에도 터널 속에도 주렁주렁

시가 익어간다

사람들은 숨차게 뛰어온 삶의 굴레를 벗어

가을의 가지에 걸어놓고

가을 내 시를 읽다가 스스로 시가 되어버린다

(높이 올라간 인간들의 투정을 미리 알아챈

눈치 빠른 하늘도 마침내 가슴을 열고

비명 같은 삿대질의 시위로 찢기고 찢겨

뚝,뚝 핏방울의 시를 떨어뜨리며)

 

시간은 멀지 않아 바퀴를 돌린다고 송신해 온다

 

 


 

김지향(佑堂 金芝鄕) 시인

1938년에 일본 규수에서 출생. 그후 경상남도 김해와 양산에 정착하여 성장. 6.25후 홍익대학교 국어국문학를 졸업, 단국대에서 문학석사와 서울여자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 시집「병실」「막간풍경」「사육제」등 25권과 시선집「살아서 노래하는 강물」「바람이 돌아온다」「김지향 99선」「김지향 시선집」, 에세이집「바람과 연기」외 다수, 시론집「한국현대여성시인연구」외 학술 논문 20여편과 화갑기념문집「내일에게 주는 안부」, 50년 기념문집「김지향의 시세계」「나뭇잎이 시를 쓴다」등 많은 저서를 펴냄. 단국대, 홍익대, 한세대 등에서 국문학을 가르쳤고 한양여대 문창과 교수. 시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박인환문학상, 윤동주문학상, 한국시인정신상, 한국민족문학대상 등 많은 문학상 등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