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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향 시인 / 개울가 그 집
신발을 벗어들고 걸으면 발바닥이 간지러운 자갈밭 호롱불 가물거리는 외딴집 까지는 몇 마장이 더 남아 있었다
한쪽 발을 들고 걸어도 양쪽발이 아픈 개울가 공사장 한쪽 끝에 가물가물 꺼져가는 호롱불의 그 집은 아직도 있었다
지붕 서까래 밑에서 잘새알을 꺼내어 친구 시중드는 일이 재미 있었던 그 아이는 오늘 부뚜막에 턱을 괴어 꿈으로 가고 새들은 서까래 밑으로 들락거리며 지붕 꼭대기에 북더기집을 만들었다
호롱불이 혼자 붙다가 만 방안 고요 위엔 무서움이 한꺼풀 더 덮여 함께 자고 있었다
밤내 울다 성대를 다친 부엉이의 안개처럼 퍼지는 울음 사이로 무릎을 쪼그리고 앉아있는 그 집 잠을 깨우는 성.누가 성당의 새벽 미사 올리는 소리만 먼저 간 주인의 혼을 부르며 개울가를 맴돌고 있을뿐
성대 잃은 부엉이 소리 혼자 버려두고 꿈속으로 먼저 간 그 남자(아이)는 어디를 가고 있는지?
개울 속엔 옛 주인의 옷자락 젖는 소리 추적추적 흘러간다
아직도 발가락이 시린 개울가 그 집.
김지향 시인 / 거울 속 풍경
흙이 하늘로 날아간 뒤 하늘에서 나무가 땅으로 가지를 뻗은 뒤
나무가 땅으로 가지를 낸 뒤 꽃잎이 땅으로 몸을 헐어낸 뒤
꽃잎이 땅으로 날아온 뒤 골목길에 떨어진 하늘 새 한 마리
하늘 새를 타고 그가 하늘로 떠난 뒤 집속 방속 벽 속 거울 속에 그가 살아있다
거울 속엔 발도 없이 걸어 들어간 어제의 사건들이 모두 살아있다
병정놀이가 땅뺏기놀이가 사냥놀이가 거울 속에 살아있다
살아있는 거울을 따먹고 하늘궁전으로 간 나는 하늘풍경을 마저 따먹는다
아, 거울 속은 내가 따먹은 내 눈 속이네
김지향 시인 / 걸으면서 잠자는 버릇
나는 걸으면서 잠을 잔다 걸어도 오는 잠은 내쫓지 못한다 눈으론 실탄을 어깨에 멘 총잡이를 보면서 권총의 자동방아쇠가 미사일이 되어 햇빛이 끝나는 우주 기슭을 뚫고 가는 장면을 목격했다 불길이 노을처럼 곱게 타오르는 현장을 입을 딱 벌리고 감상한 나는 감탄사를 연발하며 걸었다 등 뒤에서 호르라기 소리가 등솔기를 때렸다 축 쳐진 금줄을 번쩍이는 검은 옷의 늙은 사나이의 어깨가 내 옆구리를 떠밀었다 사나이의 터진 목소리가 공기를 찢어댐을 촉감으로 만지면서 나는 또 다시 아까 그 권총 사나이를 따라갔다 그는 불길 속에서 불쑥 튀어오른 한 여자를 끌어안았다 그 여자는 머리칼이 떨리고 있었다 뒤에서 쫓아오는 말탄 병정들이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나는 쯧.쯧.쯧! 강한 느낌표를 발하며 급히 말머리를 막았다 그때였다 찌~익!하고 금속성 폭발음이 귓속에 깊게 깔렸다 또 다시 호루라기 소리가 내 뒤통수를 찢었다 순경 나으리가 달려왔다
나는 그 때부터 걸으면서 잠 자는 버릇을 내버렸다 아름다운 의식의 뒤죽박죽 장난도 끝내버렸다
김지향 시인 / 겨울밤이 눈에 묻히다
나는 밤내 눈에 젖는 겨울 한 컷 일기장에 그려 넣는다
이제 연거푸 토해낸다 포식한 하늘이 벨트를 풀고 너무 오랜 시간 받아먹은 사람의 아우성, 넋두리, 비명을 비비고 버무려 하얗게 바랜 속 깊은 응어리를 게워낸다 멍울멍울 맺힌 빛바랜 녹말 알갱이를 버티칼 밖으로 부어낸다 사람들의 가슴에서 오래오래 쏘아올린 토혈이 이제 되쏟아져 내려도 스스로의 가슴에서 쌓인 가슴앓이가 뜯겨져나간 세포 조각임을 모르는 사람들은 어린아이처럼 입을 열고 창가에 앉아 의미 없는 함박웃음을 밤내 눈 속에 묻는다
하늘에 가르마를 탄다 디지털로 가는 바람 갈기 한 줄 손에 든 면도칼로 웅크린 떠돌이별 수염을 깎으려지만 미리 모두 깎여 하얗게 빛 꺼진 별은 뜬 눈 채 잠이 들었다 뼈만 남은 플라타너스가 하늘의 속앓이를 아는지 팔을 치켜든 채 하늘 심장에 바싹 귀를 대고 숨 죽여 얼어 있다 하늘과 땅, 땅과 땅 경계를 넘나들며 조금씩 살을 헐어내고 있는 공기의 폐장도 숨을 몰아쉬고 있다
하늘 위의 하늘에서 가만히 지켜보는 퀘이사만이 끝나 가는 길고 긴 아날로그의 지상 삶을 알고 있다 언젠가는 팽개치고 돌아설 시간의 속셈도 알고 있다 퀘이사가 알고 있는 시간이 한밤 우주를 붙들고 이제 잠을 씌우는지 이 간이역의 하얀 낙하산 속은 무거운 침묵만 깔려 있다
나는 밤내 일기장에서 나체로 있는 침묵 한 컷 집어먹는다.
김지향 시인 / 계절이 초록 옷을 입을 때
초록 옷 입은 계절이 초록바람을 먹고 펄럭펄럭 옷깃을 펄럭일 때 우리는 참 싱그러운 초록이 된다
숲들이 옷깃을 펄럭일 때마다 사람은 온통 초록 물감 통에 빠져 초록 숲이 된다 초록 숲이 된 우리의 가슴에 휘파람새가 숨어들어 몸 전체를 연주한다
휘파람새가 우리 몸을 연주할 동안은 사람의 눈흘김도 게걸음도 거치른 거치른 말솜씨도 일시에 화해로운 노래가 된다 초록 노래로 흐른다
김지향 시인 / 고층 아파트
담쟁이도 미끄러지고만 고층 아파트 터질 듯 볼록볼록한 품을 안고 기다란 키로 버티고 서서 아침이면 술술 풀리는 연줄처럼 구겨 넣은 내장 다 풀어내고 밤이면 빠짐없이 되감아 넣는 아파트 그 품속엔 어떤 생이 출렁이고 있는지 밖에선 깜박이는 창유리만 보일뿐 때때로 요란한 소리로 몸을 띄운 비행기가 머리 위를 짓뭉개지만 (내다보는 사람의 귓바퀴만 찢기고 말지만) 아파트 눈썹 하나 긁지 못한 비행기 하늘 저 쪽으로 튕겨 올라가면서 아파트의 불 눈에 넌지시 읽힌다
팽팽한 하늘이 여전히 황금엽서를 펼쳐놓고 화살 없는 활시위로 빛을 쏘아대고 있지만 하늘빛의 쇼올을 두르고 날마다 우주 속에 머리를 넣어 세계 별들의 집회에서 보내오는 초음속의 송신음을 듣고 있는 아파트가 깊은 잠에 빠질 땐 요술지팡이의 어린왕자가 머리를 톡톡 치며 깨운다 어린왕자의 요술지팡이를 어서 빨리 읽어 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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