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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용 시인 / 집 버리기
봄철이 채 오기도 전 전세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데 가난한 우리 가족은 이사를 간다 십년 눌러 산 집을 떠난다 우선 묵은 때 벗기듯 버릴 것들을 가차 없이 처단한다 너무 많은 것을 등짐처럼 지고 살았다 처분 대상 일호 품목은 책, 날씨 풀린 길일을 택해 천권의 책을 분리수거함으로 내보낸다 아, 속이 시원하다……할까…… 해야지…… 책속에 구겨져 있던 글자들이 숨겼던 음모를 폭로하면서 종이를 찢고 뛰어나와 내 눈을 찌를지도 몰라 자, 계산을 해보자
(책 한쪽에 원고지 5장, 그러면 1,000자가 들겠군. 한권을 평균 300쪽이라 치면, 도합 30만 자가 버글거리는군. 좋아, 한 단어를 평균 3자로 계산하면, 모두 10만 단어가 책 한권을 짓는 셈이군. 하이데거 존자께서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 일갈하셨으니, 책은 하나하나마다 10만 채의 아파트, 가히 도시라 불러도 되겠구나. 삼국지특별시, 돈키호테직할시, 열하일기광역시, 죄와벌시, 님의침묵시……)
나는 천권의 책을 버렸고 일억 채의 집을 버렸다 서민 아파트 한 채에 시가로 수억 원이니, 아, 나는, 물경 수천 조의 돈을 버린 것이렷다 아프리카 어린이 돕기에 이만 원이 아까워 망설이고 망설이다 겨우 지갑을 연 주제에 로또 백번을 맞아도 불가능한 돈을 날리고도 태평할 수 있다니 그러고도 속이 쓰리지 않다니 나도 엄청 독한 놈이다 세상 살만큼 살았구나 언젠가 내가 발라놓은 책장의 독을 스스로 찍어먹고 나는 천형처럼 고꾸라질지 몰라 내게 책을 증정해주신 죄 많은 분들이시여 언어의 황량한 고해성사여
웹진 『시인광장』 2011년 3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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