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김지향 시인 / 나의 디지털 하늘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7. 2.

김지향 시인 / 나의 디지털 하늘

 

 

디지털 버턴을 쥐고 나는 손이 붙어 있는지

더듬어 본다

너무 가벼워 날아간 줄만 알고 나는

나에게 육체가 있느냐고

물어 본다

육체가 가벼울 때

나무의 날개 사이로 보인다

하늘이 살이 붓지도 않고 양 옆으로

열림이 환히 보인다

 

그때 하늘이 먹은

새들이 꽃씨를 물고 팔랑팔랑 나오고

그때 하늘이 먹은

나뭇잎이 열매를 매달고 동글동글 나오고

그때 하늘이 먹은

바람이 물결무늬 주름진 치마폭을 펄럭이며 나오고

그때 하늘이 먹은

햇살이 치마끈을 풀어 땅에 수정기둥을 세우며 나온다

날아 나온 몸 바뀐 존재들은 가벼운 육체로

땅의 안 바뀐 존재들과 하나의 허리띠에 묶여

하나가 된다

 

나의 디지털 하늘은 이제 배가 푹 꺼져

땅에 내려와 누웠다

 

우주가 일직선으로 길게 깔려버리는.

 

 


 

 

김지향 시인 / 낮 달을 보며

 

 

길을 가다 문득

하늘만 쳐다본 날

 

가물가물 점 같은 새가

까맣게 떠서

말간 낮달을 끌고 가더니

하얀 몸의 낮달이

진종일 불에 타는 고통으로

이지러지며 혈관이 터지더니

밤이면 진홍빛의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몸이 타는 고통의 낮달을 보며

그때서야 나는 후닥딱,

너에게 준 아픔을 깨달았다

나도 혈관이 터져 진흙이 될 때까지

지켜볼 하나님의 불눈을

그때서야 깨달았다

 

오늘 내 피곤을 털어낼

원두막 그 뽕나무 집을 찾아

길을 가다 문득

하늘 기슭으로 끌려간 반쪽뿐인

낮달을 보며 뜨끔거리는

바늘 꽂는 아픔

예삿일이 아니다

 

(영혼은 육체가 없이도 아픔을 알데

하나님의 분신임도 뚜렷이 알데)

 

길도 중간부위를 넘어선 때에야

빼마른 낮달이 태양의 덤불을

빠져나지 못하듯

나의 우주도 하나님의 손바닥임이

유리알처럼 보이데

 

 


 

 

김지향 시인 / 내부 수리 중

 

 

오늘도 나는 리모컨으로 세상을 연다

 

가장 먼저 기지개를 켜는 먼지

사이로 키를 일으킨 빌딩들이

마음 놓고 꺼낸 내장을 말리고 있다

내장 속에 숨어 있던 정적들이

한 소쿠리씩 쏟아진다

 

정적 밑에 가만히 엎드렸다 툭, 툭,

불거지는 것들이 투명유리 속처럼 보인다

부서진 욕정 부스러기, 배배꼬인 야망 찌꺼기

햇빛의 주사바늘 밑에서 와글와글 끓고 있다

 

나는 얼른 리모컨으로 빌딩을 꺼버린다

그림자까지 모두 삭제하고

재빨리 장면이 바뀐다

 

좁다란 블록담 옆으로 측백나무가

길을 끌고 파랗게 간다

돌아보지 않고 가는 길 옆으로

자잘한 곷 나무들을 안고 손을 흔드는

해바라기 긴 허리도 리모컨 눈의 조리개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나는 다시 또 리모컨의 다른 단추를 누른다

빌딩 지붕 위로 길이 떠서 올라간다

피가 하얗게 씻긴 길을 끌고 간다

어디로 가는 걸까

아득히 좁아진 길 끝 거기는 어느 세상일까

 

아, 쪽문이 보인다

사람은 아무도 들어가지 않고

문 앞에 멈추어 있구나

지금 마악 도착한 진공포장지에 싼

한 사람의 손발에선

아직도 야생마 같은 피가

포장지 밖으로 지고 있구나

나는 다시 리모컨의 다른 단추를 누른다

장면이 바뀌지 않는다

리모컨도 들어가 보지 않은 길 끝 세상,

“내부 수리 중”이란 쪽지가

커다랗게 나부끼고 있을 뿐

사람들은 길 끝에서 하얗게 기다리고 있다

 

 


 

 

김지향 시인 / 내일에게 주는 안부

 

 

어디 사는지

아직도 남아 있는지 조차

알 수 없는

내일이란 이름에게

나는 안부를 보낸다

해마다 머리카락 하나 보여주지 않는

내일에게

내일이면 늦어 오늘 나는

일년치의 안부를 한꺼번에 날려보낸다

이번엔 머리꼭지라도 좀

드러내 보라고

내일 뒤 어디에 숨어있을 내일에게까지

두 손으로 안부를 불어 보내면서

안부가 가서 닿는 소재지를 알아내기 위해

망원렌즈 먼지를 닦아내고

뒤꿈치의 돌베개를 곧추 돋우고

어딘가에 살아 있을 내일에게

뜨거운 마음을 포기하지 않는

나의 노력을 알려주기 위해

하늘에다 들끝에다 바람귀에다

입을 대고

내일의 이름을 불러댄다

목청껏 목청껏 불러댄다

그러나 내일은 어딘가에 들앉아

내 목소리를 묘사하며 웃고만 있겠지

내가 잠잘 때 그도 잠을

내가 죄로 배 부를 때 그도 죄를

내가 거짓말로 속삭일 때 그도 거짓말을

흉내 내겠지

그런 내일을 사랑하는 나의 사랑이

진실임이 알려질 때까지

내가 내일의 사랑을

무식하게 신앙하는 환자임이 밝혀질 때까지

나는 주소불명의 내일에게

오늘 일년치의 안녕 안녕을

한 무더기 띄워 보낸다

그래, 그렇고 말고

내일이여, 안녕!

 

 


 

 

김지향 시인 / 눈

 

 

작은 제 몸 속에

몇 갑절의 큰 몸을 넣고 있다니!

 

작은 몸속에 앉아있는

우주의 볼에 돋은 사마귀 같은

내가 그려 넣은 종이비행기

지금 마악 산 너머 하늘 길을 넘고 있음을

말문 막힌 나는 보고만 있다

 

큰 몸이 보지 못하는 작은 몸

그게 바로 내 눈동자라니!

 

 


 

 

김지향 시인 / 눈 속의 여자

 

 

표정도 없이 하늘이 웃는다

 

좌 악 열린 하늘 입에서

소금 알갱이가 내린다

한 여자가 하늘 웃음 속으로 삭제된다

삭제되었다 나온 그 여자가 눈을 깜박일 때 마다

눈썹에서 해묵은 때가 지워진다

소금 가루가 덮어버린 그 여자의 머리가

낮게 내려온 하늘 살이 된다

하늘과 땅이 하나로 손잡은 하얀 우주를

그 여자의 실티 같은 머리칼이 금을 긋는다

하얀 소금 알갱이에 묻힌 여자의

하얗게 씻긴 가슴 속 우주엔

하늘 살을 보내준 이의 눈동자도 담긴다

 

그 여자는 몸도 마음도 백지의 우주로 재생된다

 

 


 

김지향(佑堂 金芝鄕) 시인

1938년에 일본 규수에서 출생. 그후 경상남도 김해와 양산에 정착하여 성장. 6.25후 홍익대학교 국어국문학를 졸업, 단국대에서 문학석사와 서울여자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 시집「병실」「막간풍경」「사육제」등 25권과 시선집「살아서 노래하는 강물」「바람이 돌아온다」「김지향 99선」「김지향 시선집」, 에세이집「바람과 연기」외 다수, 시론집「한국현대여성시인연구」외 학술 논문 20여편과 화갑기념문집「내일에게 주는 안부」, 50년 기념문집「김지향의 시세계」「나뭇잎이 시를 쓴다」등 많은 저서를 펴냄. 단국대, 홍익대, 한세대 등에서 국문학을 가르쳤고 한양여대 문창과 교수. 시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박인환문학상, 윤동주문학상, 한국시인정신상, 한국민족문학대상 등 많은 문학상 등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