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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지향 시인 / 눈뜨는 잎사귀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7. 3.

김지향 시인 / 눈뜨는 잎사귀

 

 

모서리가 살아난 장독대 옆구리

황금날개 바람이 앉아있다

날개는 이내 열리고 바람은 날고 있다

귀를 세워 설치던 진눈깨비는

귀가 잘려 고개를 떨구고

하늘을 깁고 있던 먹구름도

팔짱을 끼고 제집으로 돌아서고

채소 빛 하늘이 얼굴을 내민다

비어있는 마당 열 두 군데를

새로 와서 채우는 열 두 빛 햇살

지구 밖의 봄 돋는 소리도 몰고 와

초록빛 비늘을 뿌린다

황금 실을 뿜어낸다

동면 속에 접어든 오동나무는

꿈을 털고 일어서고

장독대 질항아리도

이마를 쳐들고 깨어난다

엎드렸던 내 의식은 눈썹을 내밀어

저 창 밖의 파도치는 초록물감 속을

눈뜨는 잎사귀가 되어

하늘하늘 날아간다

 

 


 

 

김지향 시인 / 눈물처럼 떨어지는

 

 

하늘엔 시린 눈이 사라졌다

팔팔 살아서 끓는 정기 쏟아 붓던

그 눈,

이젠 어디로 가고 없다

 

하늘은 돌에 맞아 상처투성이 가슴 뿐

멍청히 떠서 휘모는 폭우에도 귀우뚱거린다

 

하늘 가슴에 대고

마구잡이로 쏘아 올린 사람들의 돌팔매

녹도 슬지 않고 이제껏 쩌렁쩌렁 박혀 있으니

이제껏 분수처럼 치솟는 돌팔매

피투성이 가슴으로 맞고 있으니

어쩌나

 

하늘에 대고 삿대질하는

사람들에게

침묵의 깊은 물음 던지는 듯

돌팔매 박힐 때마다

빗물처럼 주루룩, 떨어지는 눈물을

 

사람들은 그게 사랑인줄

하늘의 가없는 사랑인줄 모른다

 

 


 

 

김지향 시인 / 눈사람

 

 

다리 긴 바람이 눈을 뜨고 뛰어간다

바람의 손이 머리를 빗기는 안마당이

귓불을 비비며 일어앉는다

땅 밑으로 쫓겨난 나무 뿌리도

뛰어가는 바람의 행방을 잡고 있다

쨍그렁, 깨지는 창밖의 샐로판지 위로

강아지 두엇이 꼬리를 떨면서 튕겨간다

바람만 나와 설치는 빈 뜰에

중절모를 눌러 쓰고 흰 두루마기를 펄럭이는

눈썹 흰 사람이 내려와

술렁술렁 아이들을 불러내고 있다

우리집 아이들은 마술 가위를 들고 나와

그 흰 사람의 흰 머리칼을 베어

내 머리를 덮고 있는 먹구름을 지우고

그 흰 사람의 흰 손가락을 뽑아

내 이마에 순결의 무지개로 오려 붙이고

술렁이는 뜰 안에서 깊이 잠든

내 의식을 두드리며 마술 가위의 아이들은

오만 개의 눈 뜬 오만 개의

바람소리를 만들고 있다

 

 


 

 

김지향 시인 / 다리뿐인 햇빛

 

 

나는 발코니 쪽문에서

총알을 날렸다 갈퀴를 세우고 뛰어가던

강이 퐁, 퐁, 퐁, 장파열을 일으켰다

가닥가닥 실타래처럼 잘려나가는

물의 살결들

둑 너머 둑으로 물의 실타래는 마음 놓고

퍼져나갔다

둑을 마구 넘어갔다

바둑돌들이 빠진 둑

이마가 뜯겨나갔다

 

(둑 밖으로 쫓겨나온 물고기들이 눈을 뜨고 잔다

주사바늘을 손톱처럼 세운 햇빛이 물고기에게

불주사를 놨다 까맣게 타버린 물고기들에게

햇빛은 연속사격을 가했다)

나는 햇빛의 뷸꽃 사격이 나를 겨냥한 줄도 모르고

또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퍼엉! 햇빛을 관통했다 1초 동안

내 눈에 튀어든 빛 가루가 까맣게 눈을 태웠다

까만 눈을 끌고 간 블랙홀, 1초의 어지러움 너머

빛 부신 은빛나라가 반짝였다 1초 동안

강물을 뚫고 햇빛을 뚫어야 보이는 하얀 나라!

햇빛은 수평도 수직도 아닌

땅도 나라도 없는 빼 마르고 기다란

다리만 촘촘하다

다리에 구멍을 내도 금방 아물어버리는 그

물렁살이 은빛의 하얀 나라를 감추고 있다니!

 

 


 

 

김지향 시인 / 다시 또 절망에게

 

 

오늘도 길은 낯선 곳으로 뚫고 간다

 

시간은 날마다

내 발에 노끈을 묶어 낯선 길로 끌고 가지만

(낯선 시간에 희망을 걸고)나는 따라 가지만

그 곳도 똑 같은 세상이구나

절망아,그 곳에도 황사바람 몰아부치고

산성비 쏟아지는 진펄이구나

 

우회선도 없는 일차선로 중앙부에 접어든

내 발은 위험과 손 잡고

점점 거세게 몰아부치는 황사바람에

키가 다 구겨져서

점점 거칠게 퍼부어대는 산성비에

살갗이 닳아 떨어져서

쓰러졌다 일어남을 반복하며

오늘도 길에게 코가 꿰인 내 발이

따라가며 이제 그만 불시착이라도 하고 싶다

 

시간의 노끈이 내 발을 놓아주기를,

삶과 죽음이 폭파되어 한 세계로

어우러지기를 꿈 꾸며

누군가에게 들키면 지상에선

영영 소각되어 버릴 위태로운 꿈을 몰래 꾸며

세상을 깨뜨렸다 일으키는 의식운동을 되풀이한다

 

절망아, 내가 너무 두려움없이

낯선 길을, 낯선 시간을 사랑했나 봐

깨끗한 그 곳인줄 알았던

내 믿음이 배반 당한 삶(내가 지독하게 사랑하는)

절망아,네게 길들여진 삶

나는 그 삶의 주인일까

삶이 나의 주인일까

아직도 석연치 않은 물음을 안고

오늘도 나와 삶은 낯선 시간 속으로 가고 있다.

 

 


 

 

김지향 시인 / 다시 열린 봄날에

 

 

활짝 열린 봄 속으로 들어선다

겨우내 외롭던 꽃밭이 식구들로 가득하다

빵긋거리는 노랑 빨강 하양 뺨들을 다독이며

*창준의 손을 잡은 나는

꽃으로 피던 시절을 생각하며 걷는다

아이의 손에는 빨간 꽃이 내 손에는 하얀 꽃이 복사된다

지난 겨울 떨군 꽃의 눈물이

다시 꽃을 피운다는 사실을 아이에게 설명하면서

어린 세대와 낡은 세대가 서로 다른 생각 속에

꽃들을 복사한다

시간은 그 시간이 아닌데 꽃들은 왜

그 꽃이지? 하고 아이가 물어오면

나는 어떻게 대답할까

아이의 말은 왜? 왜? 로부터 시작하고

길어지는 나의 대답엔 귀를 닫아버린다

대답에 궁색한 나는 아이가 스스로 알아갈

길만 안내해준다

 

아이는 얼마 안가 혼자서 봄 속을 달려갈 것이다

 

 


 

김지향(佑堂 金芝鄕) 시인

1938년에 일본 규수에서 출생. 그후 경상남도 김해와 양산에 정착하여 성장. 6.25후 홍익대학교 국어국문학를 졸업, 단국대에서 문학석사와 서울여자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 시집「병실」「막간풍경」「사육제」등 25권과 시선집「살아서 노래하는 강물」「바람이 돌아온다」「김지향 99선」「김지향 시선집」, 에세이집「바람과 연기」외 다수, 시론집「한국현대여성시인연구」외 학술 논문 20여편과 화갑기념문집「내일에게 주는 안부」, 50년 기념문집「김지향의 시세계」「나뭇잎이 시를 쓴다」등 많은 저서를 펴냄. 단국대, 홍익대, 한세대 등에서 국문학을 가르쳤고 한양여대 문창과 교수. 시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박인환문학상, 윤동주문학상, 한국시인정신상, 한국민족문학대상 등 많은 문학상 등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