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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연배 시인 / 눈이 되어 내리고 싶다
눈이 내린다. 꽃잎과 함께 사라져 우리를 스산케 했던 나비 떼들 분분히 날아와 스스로 꽃이 된다. 납작 엎드려 치러야 하는 죄 그래서 눈꽃엔 향기가 없다. 눈은 소리 없이 녹을 것이고 녹아서 누군가의 피톨로 흐를 것이다. 그때 나는 보리라. 우쭐우쭐 돋아나는 새싹과 맨발로 걸어도 좋을 향톳 길에 싱싱한 꽃대를 거침없이 밀어 올리는 들꽃의 씩씩한 이름들을. 과음 뒤의 속 쓰림 같은 절망의 힘도 없어서는 안될 하루 분의 양식 새벽길의 눈으로 내리고 싶다. 어지러운 발자국으로 얼룩진 불온한 길을 하얗게 표백시키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 마음 속 그리운 풍경이 되고 싶다.
구연배 시인 / 늦매미
뒤늦게 애벌레를 벗고 우화한 늦매미 한 마리 처서 백로를 훌쩍 지난 가을 나무를 잡고 운다. 높다란 가지 끝에서 내려올 줄 모르는 저 극진한 울음. 친구들은 가고 사랑도 찾을 수 없고 녹음을 훑어 내리는 찬바람만 불어와 단풍잎들 하염없이 뚝뚝 떨어지는데 하마 귀까지 어두워 졌는지 외로워 말라고 매앰 맴 맞소리를 내주니 포르릉 내 곁까지 날아와 때동나무를 잡고 다시 운다. 산 도랑물에 지는 하얀 때동나무 꽃잎처럼 극진한 울음을 남기고 매미는 진다. 그렇게 꽃잎 지는 봄과 생이별이더니 내내야 그 도랑물에 울음 떨어져 여름이 간다. 세월이 흘러간다.
구연배 시인 / 동백꽃.2
무심히 피는 동백은 봄을 인(印)치는 가장 확실한 증거
붉은 인주를 묻혀 도장을 찍듯 메마른 땅에 꾹꾹 봄을 날인한다
너에게 바친 나의 순결을 기억하라 꽃잎 혈흔을 보고 어깨를 들썩이며 한참을 울먹이던 눈물 속에서 오호라 긍휼한 사랑이 싹텄느니
동백숲 속에 숨어 찻잎을 고르는 처녀야 너를 안고 쓰러진 것이 산 너머 봄이렸다 피 끓는 바람이렸다
구연배 시인 / 먹 자두
그녀는 한 가지 옷만을 입습니다. 아니 한 가지 색깔만을 고집해 무얼 입어도 그 옷이 그 옷 같아 보일 뿐입니다. 머리도 미장원이 아니라 쓱쓱 손수 깎아버리니 오히려 가발을 멋으로 얹고 다니는 사람 같습니다. 화장은 하지도 않고 할 줄도 모릅니다. 그녀는 돈도 없습니다. 아니 많이는 버는데 누군가가 다 가져가는 모양입니다. 자선 사업가는 아닌데 먹여 살려야 할 식구가 많답니다. 당연히 통장도 없고 그 흔하디 흔한 카드 하나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한 가지 색깔의 옷만 입는데 언제 봐도 맵시가 있고 선머슴 같은 더벅머린데 건강한 스타일러 같고 맨 얼굴에 맑은 실 정맥이 이목구비와 절묘하게 어우러져 마치 가을밤의 화한 박꽃 같습니다. 빈털터리가 분명한데 다녀온 곳이 여간 아닙니다. (시시할까봐 얘긴데 프랑스 이태리 뭐 이런 곳들이랍니다) 산양 뿔처럼 당당하고 얌전한 발목에 웬 호기심이 그리도 많은지 뭐라고 한 마디로 말하기 어려운 사람입니다.
자두를 먹습니다. 그것도 붉은 핏기가 뚝뚝 묻어날 것 같은 싱싱한 먹자두를. 아시겠지만 자두는 비를 맞으면 금방 빗물 맛이 배고 햇볕을 쬐면 금새 단맛이 드는 과일이지요. 그녀가 그렇습니다. 하늘이 주는 침묵과 말씀에 마음을 반응하는 여자. 그리하여 그 계절의 바람 맛이 나는 여자. 하늘이 잘 익힌 먹 자두 같은 여자입니다.
구연배 시인 / 멈춘 시계에 대한 단상
멈춘 시계를 본다. 화석이 되어버린 시간을 본다. 가야할 길이 아직도 멀다는 듯 시침은 새벽을 가리키고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새벽 앞으로 내달렸을 것인가. 생의 마지막 날을 가슴에 새겨 넣은 멈춘 시계여. 너를 들여다보면 그리운 내 유년을 만날 수 있을까. 시디신 허무를 끌어안고 새벽 가로등 불빛을 하염없이 쬐던 창백한 청년을 만날 수 있을까. 고장난 마음 불통의 시간을 교체할 요량으로 시계 방 유리문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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