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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명리 시인 / 낙원의 풍경

by 파스칼바이런 2020. 7. 2.

김명리 시인 / 낙원의 풍경

 

 

  오래 바라보면

  바라보는 몸이 활처럼 휘는 순간이 있다

 

  보이지 않는 선을 넘어서지 않으려고

  구름의 표면장력을 팽팽히 조이는 봄 허공

  바람에 휩쓸리는 것들은 죄다

  밤보다 더 깊이 뿌리내린 검푸른 수초들이다

 

  발 자칫 헛딛는다 해도

  여기서는 길을 잃어버릴 염려가 없다

  오래 바라보면 바라보는 몸이

  낙원의 풍경 같은 고인 물 속 어딘가에

 

  애욕이 비눗방울처럼 부푼, 생이 만발한 방이 있어

  물속에 내린 열나흘 달이

  꽃 핀 고사목처럼 기우뚱 부풀어 오르는 봄밤

 

  낡은 상앗대로 간신히 괴어 논

  꽃 피는 밤의 무게에 활처럼 휘면서 번지면서

 

  모든 슬픔을 그 속에 지닌

  품속에 지녀온 날카로운 비수를

  가만히 내려놓아야 할 순간이 온 것이다

 

웹진 『시인광장』 2011년 4월호 발표

 

 


 

김명리 시인

1959년 대구에서 출생. 1984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시집으로 『물 속의 아틀라스』(고려원, 1989), 『물보다 낮은 집』(미학사, 1991), 『적멸의 즐거움』(문학동네, 1999), 『불멸의 샘이 여기 있다』(문학과지성사, 2002)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