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김지향 시인 / 따먹은 잡동사니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7. 4.

김지향 시인 / 따먹은 잡동사니

 

 

오늘도 안 가본 길을 걷는다

 

(낯설게 달려오는 세상

따먹고 싶은 나는 방에 갇히지 못한다)

나는 날마다 휴대폰으로

세상을 따 먹는다

온갖 잡동사니를 물어오는

휴대폰 머리꼭지의 머리카락

그에겐 하늘 내장도 저장되어 있다

길을 가다 문득 하늘을 따먹고 싶어

산꼭대기 상상봉으로 발을 끌어 올렸다

가만히 누워서 하늘의 혈관을 찾고 있을

그 때 그 하늘을

내가 백발백중의 투창질로 구멍을 냈다

휴대폰이 하늘 풍선 한 자락을 움켜쥐고

풍선 배꼽을 탕 ,탕, 탕, 우그러뜨렸다

한쪽 귀퉁이가 먼저 스르르 자취를 감춘다

휴대폰 머리칼이 먹어치운 하늘이

휴대폰 뱃속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다

너무 많은 하늘의 영양소들이 엉클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공기를 패대기치고 있다

별은 별끼리의 도킹으로 부화가 되는지

휴대폰 입으로 별싸라기가 새나와

온몸에 아이섀도우를 칠해 놓고

삐리리~~ 삐리리~~ 부딪는 마찰음으로

내 청각신경을 괴롭힌다

한 요리사가 허드레 잡동사니 날것들을

냄비에 올려놓고 이리저리 굴리며 볶아대는 소리

냄비를 굴릴 때마다 휴대폰 온몸이

난잡하게 뒤틀린다 뒤틀리는 휴대폰

아, 알고 보니 내 속이네 내 속을 뒤집어 놓고 있네

나는 사람일까 물체일까

무엇이든 꿀꺽 삼키기만 하면 소화가 되어버리니!

 

따먹은 하늘의 잡동사니

내일은 또 무엇이 되어 태어날지?

 

 


 

 

김지향 시인 / 때로는 나도 증발되고 싶다

 

 

열손가락을 부채살처럼 펴고

컴퓨터 키보드를 한꺼번에 눌렀다

잠시 엷은 주름 사이

그림자뿐인 유리집 자동문이

스르륵 열렸다

그녀는 들어갈까 말까 망설임도 없이

습관적으로 머리꼭지를 드밀어넣었다

유리집에 잠입한 그녀는

간첩처럼 귀를 세우고 몰래 벽에 걸려 엿본다

정물 하나 없는 움직임들이 무리무리 지나간다

나뭇잎 널브러진 키 낮은 산들이 지나가고

이마 훤한 지붕들이 지나가고

강아지떼가 고양이떼가 돼지떼가 지나가고

먼지가 지나가고 바람이 지나가고

해묵은 미해결 건수가 지나가고

지나가는 건수들은 모두 줄을 서듯 입에

앞의 꼬리를 물고 물고 물고

초고속으로 지나간다

형상을 가진 사물들은

모두 발도 없이 유리집 사이버 속으로 들어간다

인터넷 A가 인터넷 B와 인터넷 B가 인터넷 C와

불똥을 퉁기며 번개처럼 접속된다

온 우주가 인터넷 속에서 한 개

점이 되어 그녀 두뇌 속으로 도랑물처럼

기어들어간다

나는 삐걱거리는 두뇌로

가끔은 형이상 속으로 증발되고 싶다.

 

 


 

 

김지향 시인 / 로봇과 가을

 

 

여름이 시들시들 시들 때

나는 내가 키우는 로봇을 풀어놓았다

 

파닥파닥 팔을 부딪치며 보듬고 있던 모닥불을

옆의 옆 앞의 앞 나무 겨드랑이에 쏟아 부었다

부글부글 끓는 나무 가슴팍에서 불길이 척추 위로 치뻗었다

로봇에게 지고 만 여름이 꼬리를 스르륵 감추었다

나무 겨드랑이엔 불똥 같은 뾰루지가 입을 뽀르통, 내밀었다

 

찻길 너머 산속, 키 낮은 풀밭에서도

로봇이 화약통을 엎질렀다

온 산이 빨갛게 성이 났다

찔레꽃 덤불도 엉겅퀴도 단풍나무도

낯익은 얼굴들이 새빨갛게 불이 났다

 

당분간 시간은 가을에게 발목 잡혀 산속 깊이 주저앉았지만

불길 속을 혼자 달려가는 불덩이 로봇, 멈출 줄 모르는

나의 로봇, 또 무슨 일을 저지를지?

온몸에 화약통을 달아준 나는

나의 서투른 고집 같은 시행착오를 후회하지만.

 

 


 

 

김지향 시인 / 리모컨과 풍경

 

 

휴일

심심한 저녁 때

나는 창가에서 잠자는 리모콘을 깨운다

리모컨의 뇌세포는 나보다 훨씬 개수가 많은지

나보다 먼저 내 생각을 알고 있다

 

리모컨이 창 밖의 창을 열어제낀다

깊숙이 집어넣은 내 눈에 들어온 사람들

가라앉은 몸속에 다 저문 삶을 꼬깃꼬깃

접어 넣고 앉아 있다

 

사람을 지나 창밖으로 몸을 누인

강변북로로 간다

 

멀리 다림질이 잘된 빌딩 머리에

홍시 같은 햇덩이가 오늘도 어김없이

몸이 뭉개지고 있다

빌딩 목으로 넘어가는 다리 짧은 시간이

원추형으로 으깨진 핏덩이 몸을 끌어간다

 

꼴깍, 나의 리모컨 조리개가

전기 고압선에 얽혀 뇌세포 한 둘쯤 죽어버렸는지

강변 한쪽 풍경이 지워졌다 한쪽 구석은 접혀졌다

 

접혀진 풍경 옆구리 버티고 선 다리 사이

또 한개 다리가 강을 건너뛰고 있다

눈에 안약을 넣은 수은등이 파란 눈을 반짝이며

강변북로의 삶을 들어 보이고 있다

 

접혀진 풍경을 펴본다

뒤로 밀쳐진 사람들이 나온다 어둠이 되고 있는

사람의 의미 있는 아픔들이 내다본다

방금 빌딩 목울대로 넘어간 햇덩이의 각혈처럼

 

(바깥 풍경만 보는 이들은 아무도 접혀진 삶의 아픔을 모르지만)

 

눈치 빠른 나의 리모컨은 아직 자지도 않지만

남은 다른 쪽의 풍경을 다음 휴일로 넘겨버린다

깊은 밑바닥이 드러날 땐 얼른 조리개를 꺼버리는

리모컨, 나보다 지능지수가 얼마나 높은지?

 

 


 

 

김지향 시인 / 망원렌즈와 시라세니아 잎

 

 

길과 강 사이가 붙어 있다

붙어 있는 틈새를 뒤로 빼내며

키를 쑤욱 뽑아 올린

하얀 머리의 아파트 발코니가

주춤 뒷짐 지고 서 있다

 

아파트 머리를 뒤로 밀며 강으로 눈을 내민 망원렌즈는

강물을 복사뼈에 걸치고 바삐 가는 시간을 붙잡느라 부산떤다

 

낮에는 하늘에 이마 내걸고 오지랖에 하늘 말을 받아 담는

밤에는 강변에 귀를 던져 허드레 폐지 같은 사람의 말들을

귀로 주워 먹는 아직 나이 어린 S아파트

 

몇 덩이 정적 같은 그의 내부가 궁금한 나의 망원렌즈는

아름다운 정적 내부로 몸 전체를 밀어 넣었다

종일 팔을 세우고 기다리고 있던 시라세니아 잎사귀

그가 렌즈의 몸 전체를 움켜쥐었다 앗찔,

혼신의 눈을 모으고 뚫어보는 렌즈 사면이 꽉 막혔다

 

궁금증의 내부, 아래 위 사방에서 사기그릇 깨지는 소리

소리와 소리가 뛰어가며 부딪는 운동장이 되었다

몇 포기 남지 않은 머리칼이 소름처럼 윗마을로 치켜서고

심장박동소리가 심지 닳은 호롱불로 가물거리지만

아직 맑은 영혼으로 암호 같은 출구를 찾으며

나의 망원렌즈는 강변 S아파트 내부의

정적을 깨뜨리는 그 시라세니아 잎 속에서

아직은 살아 있다.

 

 


 

 

김지향 시인 / 몸살 앓는 하늘

 

 

간밤 내

깔깔, 봉오리 웃는 소리만 났다

 

아침에

하늘이 한 뼘도 남지 않았다

 

봄 내

하늘은 가득 찬 꽃잎으로 몸살을 앓는다

 

해는 어디에 있는지

진종일 빨간 명주실만 내려보낸다

 

 


 

김지향(佑堂 金芝鄕) 시인

1938년에 일본 규수에서 출생. 그후 경상남도 김해와 양산에 정착하여 성장. 6.25후 홍익대학교 국어국문학를 졸업, 단국대에서 문학석사와 서울여자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 시집「병실」「막간풍경」「사육제」등 25권과 시선집「살아서 노래하는 강물」「바람이 돌아온다」「김지향 99선」「김지향 시선집」, 에세이집「바람과 연기」외 다수, 시론집「한국현대여성시인연구」외 학술 논문 20여편과 화갑기념문집「내일에게 주는 안부」, 50년 기념문집「김지향의 시세계」「나뭇잎이 시를 쓴다」등 많은 저서를 펴냄. 단국대, 홍익대, 한세대 등에서 국문학을 가르쳤고 한양여대 문창과 교수. 시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박인환문학상, 윤동주문학상, 한국시인정신상, 한국민족문학대상 등 많은 문학상 등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