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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구연배 시인 / 뭉게구름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7. 4.

구연배 시인 / 뭉게구름

 

 

가을이면, 너희들을 부를 이름이

뭉게구름 말고는 없다.

올올이 잘 짜여진 푸른 비단 같은 녹음도

한순간에 사라지고

장한 기백으로 넘실대던 강물도

속절없이 들녘에 저물어

가슴에 얼굴을 묻고 저 혼자 깊어간다.

외롭지 않은 것이 무엇 있으랴

생각도 추억도 온통 뭉게구름

빈 하늘에 돋는 총총한 별도

그대 떠난 밤에야 뭉게뭉게 빛나고

홀로 걷는 발부리에 낙엽도

뒹굴며 시선 밖으로 사라진다.

가을은 왜 모든 게 뭉게구름 같을까

꽃 하나도 피워낼 수 없는

서늘한 쓸쓸함으로

세상의 모든 그늘이 자취를 감추고

길 위의 사람들은

젖은 고독을 빳빳이 다림질 해

마음 줄에 걸기 바쁘다.

사는 일이 뭉게구름 같다.

 

 


 

 

구연배 시인 / 미리내 가는 길

 

 

매주 봐도

매주 그리운 사람

 

끈적이지 않고

비린내 나지 않아 좋다

 

있는 대로 찍어내는

사진쟁이라서 그런가

(언필칭 작가님이시다)

숨기고 자시고가 없는

앞 뒤 투명한 사람

 

무거움도

그 앞에서는 끝없이 명랑해지는

그래서 가난한

지긋한 그 사람이 좋다

 

재미 진 얘기와

술맛도 아는

인간 제용.

 

 


 

 

구연배 시인 / 바람꽃

 

 

향기 없이는 만나지 말자

목마름만 주는

물기없는 말로는 더 이상

그립다 말하지 말자

사랑의 이름으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상처를 주는가

그러면서 너 때문이야 라는 참담한 말을

듣거나 해야 할 때

더 이상 스스로를 속이려 말고

덩그렁 혼자가 되자

앞산도 모르게 피고지는 바람꽃처럼

이게 아닌데 하고 느낄 때쯤이면

너무 늦다

사랑은 말할 수 있을 때 향기롭고

이별은 말하지 않을 때 아름답다

 

 


 

 

구연배 시인 / 벌레의 가르침

 

 

나뭇잎 위에서 마음껏

세상을 재고 살았던 자벌레들

농익은 몸을 툭, 툭

허공에 던진다

 

살아온 길을 되밟아가기엔

너무 먼 그곳

마음의 눈을 뜬 자에게 열리는

허공의 지름길로

목숨 걸고 투신한 자벌레만

땅 속에

제 알을 묻는구나

 

거듭 사는 비밀이 예 있느니

벌레에게서 배운

아침 정신이 달고 쾌하다.

 

 


 

 

구연배 시인 / 봄 안개

 

 

차라리 거대한 한 송이 꽃

가늠할 길 없는 깊이의 안개 속으로

사람들이 걸어가고

자전거 바퀴가 구르고

닫힌 창문들이 하나 둘 꽃잎처럼 열린다.

안개를 마시며 아련히 비치는 길을 걷는다.

조심하는 눈빛으로 허공을 날던 새들이

처마 밑에 웅크려 젖은 깃털을 말리고

마실 나온 실바람이

사람들의 삽짝 앞을 기웃거릴 뿐

누구도 선뜻 안개 속을 빠져나가지 못한다.

포근한 안개 속에서

하루치의 햇볕이 꿈틀대며 번져간다.

들녘을 가로지른 강둑 너머로

범람하는 개구리 울음소리

모든 이름 있는 것들이

아름다운 하루의 삶을 위하여

세상의 아침 식탁에

노래를 준비해 올린다.

풀잎마다 매달린 이슬방울들이

흔들리며 소리를 낸다.

선한 세상, 안개는 그늘이 없다.

 

 


 

구연배 시인

전북 진안출생 *1995년 전주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1995년 자유문학 시 추천 완료. <자유문학> 신인상(시) 수상. 시집 <빗방울은 깨져야 바다가 된다> <물의 간극> <몽리몽외(夢里夢外)> <환한 꽃그늘> <사계 그리고 환절기>. 현재 서해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