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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지향 시인 / 봄 편지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7. 7.

김지향 시인 / 봄 편지

 

 

들 끝에서

조그만 나비 한 마리가

날아왔다

내 눈이 주워 먹었다

내 눈엔 뾰족뾰족

샛노란 개나리가 돋아났다

개나리는 시간마다

2. 4. 6 으로 갈라져 흩어졌다

작년에 져버린

들 밖의 봄이

세상 속에 가득 깔렸다

 

나비는 봄의 배달부였다

 

 


 

 

김지향 시인 / 봄 혹은 안개꽃

 

 

봄눈이 초록 물을 떨구며 나르고

알싸한 바람이 초록 물에 젖으며

투정을 부리고

안개꽃이 머리를 흔들며

자꾸 구겨져 내리는 망사 손수건을

털어내기 바쁘고

창밖과 창안은 서로 다른 안개꽃들이

안개를 피우며 머리만 빼들고

물방울처럼 흘러 다니고

 

(창 밖 세상은 안개꽃 부딪침 또는

뒤엉킴일 뿐)

 

열아홉 사춘기 때

맨 처음 감춰두었던 안개꽃 사랑을

더듬더듬 찾아낼 수 있을지

바람의 그 낡고 거친 손이

붙잡으면 이내 사그라지는

안개 같은 처음 사랑,

왜 하필 헝클어진 머리칼로

봄눈 속에 목을 빼고 있는지

 

봄눈이 초록 눈물로 내리는 창밖

몸 풀린 바람이 큰 손바닥을 펴고

새하얀 볼에 깜박이는 안개꽃 푸른 눈망울을

(그때 잃은 처음 사랑인줄 알고)

싸악 쓸어 가버리네)

 

 


 

 

김지향 시인 / 봄꿈 1호

 

 

하늘에 쌓인 비,

올이 풀렸다

터진 실밥이 날리다가

와르르 치마폭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려

 

집 전체를 차지하고도 배가 고픈

비가

사방으로 갈기를 뻗어

떠내려 오는 비명을 걷어 삼키고도 배가 고픈

비가

등줄기를 치켜들고 바람이 되어 달린다

비켜, 비켜, 소리 지르며 넘어지는

집 기둥을 잡고 버티던 나는

기둥과 함께 나둥그러져

머리에 대못으로 박히는 비의 부리를

두 주먹으로 짓 으깼지만

머리칼 하나 남기지 않고

벌초나 하듯 싸악, 쓸어 쥐며

비가 땅 끝으로 가는 중이다

 

삶의 필름이 말끔히 씻겨

백지가 된 나는

땅 끝의 풍경을 백지에 주워 담아

새 필름으로 땅 끝에서

하늘가는 삶을 새로 시작하려다가

 

깨고 보니 애석함뿐인

황홀한 봄꿈이었다.

 

 


 

 

김지향 시인 / 봄밤을 태우는 초롱꽃

 

 

키를 꼬부려 한껏 품고 있던 불씨를 드디어 내놓은 나무들

나무들이 오지랖읕 열 때마다 뭉텅 뭉텅 불무더기가 나온다

곁에 섰던 바람이 체머리를 흔들며 뛰어간다

 

바람이 뛰어가며 체머리를 흔들 때마다

불씨도 사방으로 퉁겨간다

겨우내 곤히 자던 강이 입을 크게 열고 물줄기를 쏘아 올린다

바람이 펴놓은 하늘로 치솟은 물줄기 초롱꽃으로 내려온다

 

바람이 강둑으로 몸을 누인다

따라가던 길도 옆으로 초롱꽃을 끼어 차고 드러눕는다

바람도 진화하는지 길 없는 길을 메어치며 쏙쏙 초롱 혀를 날름거리지만

사람들은 초롱불에 데이지도 않고 와~와~ 소리만 지르며 바람 속으로 사라진다

 

봄밤도 불길처럼 마음을 태우던 아픔도 불꽃에 타다 잠든다

타지도 않은 나는 봄 문턱을 빠져나와 초롱불 곁에 멍청히 서서

불꽃을 휘날리는 뜨거운 바람만 자꾸 호주머니에 집어넣는다

 

 


 

 

김지향 시인 / 봄비 그리고 새싹

 

 

공간 밖 공간에서 자물쇠 망가진 분수가

허름한 지상의 버티칼을 열어 제치고

자꾸 몸을 헐어내고 있다

 

미안한 듯 고개를 수그리며

어머니 몸을 뚫고 제멋대로 솟아나와

환한 세상구경을 하고 있는

앙증스런 손가락들이

땅의 얼굴을 곰보로 구겨놓고

팔랑개비처럼 팔랑팔랑 흔들어대며

자꾸 물을 부어주는 아버지를 향해

공간 밖 공간에다 대고 고개를 꾸벅거린다

 

하룻밤 사이 수만 장의 파란

그림엽서를 땅 끝까지 펼쳐놓은 아이들

 

 


 

 

김지향 시인 / 봄비 속에서

 

 

돌담 위에서

나무등걸에서

방울방울 푸른 물이 떨어진다

떨어지는 물방울엔 갈고리가 있어

풀들의 머리를 움켜잡는다

길게 목이 뽑혀져 나온 풀꽃들이

부끄러워 바위틈에 얼굴을 파묻는다

풀꽃들의 얼굴은 숨을수록 더욱 불거져 나오고

벌써 이마가 반짝이는 쑥잎이

나무 등걸에 쑥물을 들이고 있다

회양나무 쭈그렸던 허리도 벌떡 일어나

머리를 씻고 종아리를 씻고

부리가 새파란 새끼 제비를 태우고 있다

빗물 쫑, 쫑, 떨어진 자리마다

깨끗한 얼굴, 깨끗한 세상

꽃분홍 꽃밭에선

꽃분홍 꽃망울들 불꽃놀이 하고

불티 송이송이

산과 들에

멀리 멀리 뛰어간다

아, 불꽃 뛰어가는 송이 속에

나는 또 왜 섞여 있나

화끈 화끈 가슴이 달아

나이도 줄줄 흘려 버리면서

새로 피는 꽃이

처음 있는 꽃이 되려고

뛰어가니

어쩌나

 

 


 

김지향(佑堂 金芝鄕) 시인

1938년에 일본 규수에서 출생. 그후 경상남도 김해와 양산에 정착하여 성장. 6.25후 홍익대학교 국어국문학를 졸업, 단국대에서 문학석사와 서울여자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 시집「병실」「막간풍경」「사육제」등 25권과 시선집「살아서 노래하는 강물」「바람이 돌아온다」「김지향 99선」「김지향 시선집」, 에세이집「바람과 연기」외 다수, 시론집「한국현대여성시인연구」외 학술 논문 20여편과 화갑기념문집「내일에게 주는 안부」, 50년 기념문집「김지향의 시세계」「나뭇잎이 시를 쓴다」등 많은 저서를 펴냄. 단국대, 홍익대, 한세대 등에서 국문학을 가르쳤고 한양여대 문창과 교수. 시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박인환문학상, 윤동주문학상, 한국시인정신상, 한국민족문학대상 등 많은 문학상 등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