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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구연배 시인 / 일도 사랑도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7. 7.

구연배 시인 / 일도 사랑도

 

 

이거 아니면 죽을래! 하던 마음이

어느 날

다른 일감 다른 사람을 찾는 순간

나는 비겁하게 나이를 먹는

세월의 하이에나가 된다.

염치도 없이

나는 나를 용서하겠지만

너는 나를 용서하지 말아라.

그렇게 해서 얻은 지혜로

순결한 세상을 능멸하는 나이여

늙음이여.

살겠다고 눈감아버린 등뒤에서

버림받은 추억이 울고

잊혀진 사랑이 운다.

 

 


 

 

구연배 시인 / 잠들어도 그리움은 쉬는 날이 없네

 

 

당신은 나를 위해

단 한 번도 깨끗한 얼굴로 다가오지 않았네.

때 묻고 땀 젖은 모습이어도

그림자 짙게 드리워진 당신의 넓은 등이

하얗게 빛나도록 닦아드리리니

아주 가끔씩일지라도

나를 찾는 그 마음 내 알기에

뼈가 닳는 아픔도

살 깍이는 고통도 기꺼이 즐겁네.

거품이 되어 슬픔을 안으로 감추는 동안

당신은 나를 말끔히 씻어내네.

오, 티없이 맑은 당신. 이제 나

그대 마음 속 그늘도 지워버리고

생생히 윤(潤)을 내리니

흙 묻은 모습으로 다가와 눈부신 속속들이

깊고 그윽한 향기로 남아

그대 우울한 머리맡을 떠나지 않으려네.

꿈꾸소서, 끝없이 나를 덜어냄으로

고이는 행복

잠들어도 그리움은 쉬는 날이 없네.

 

 


 

 

구연배 시인 / 장 맛

 

 

간장독에

고인 달

 

몸 바꿔가며

익고 있다

 

몇 보름

몇 그믐을 견뎌야

장으로 우러날까

 

간장 맛은 달 맛.

 

 


 

 

구연배 시인 / 지는 꽃

 

 

하르르 떨어진 꽃잎이

반기던 걸음에 짓밟히고

서운한 어떤 것은 진물을 흘리는

꽃나무 그늘에 가면

그 날 그 밤의 환하던 몸이

어금니 깨물고

어떻게 세월 속으로 녹아들어야 하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숨을 멈추고

제대로 한 번 뜨거운 목숨이 되게 하신

그 짧은 열정으로

비로소 긍휼한 삶이 열리느니

 

그런 까닭에

꽃 같은 사랑을 받는 일은 언제나

쓸쓸하고 황홀한 것!

 

발등에 떨어지는

꽃잎의 얘기를 자분자분 듣다보면

상처는

저절로 아무는 게 아니라

스스로 채우는 그리움이란 걸

알 수가 있습니다.

 

 


 

 

구연배 시인 / 철새

 

 

황도의 기울기를 어떻게 알았을까

여름 숲의 새들

무리지어 날며 떠날 채비를 한다.

봄이면 어김없이 찾아와

광막한 언덕에 노래를 더하고

잊혀진 나무와 꽃들을 기쁘게 하더니

풀잎 끝에 차가운 이슬 맺히고

그늘마다 서늘한 깊이를 더하는 처서 아침,

훌훌 털고 숲을 빠져나간다.

다 있어도 노래가 없으면 삭막한 세상 잔치에

짧게 때로는 길게

따뜻한 풍경이 되게 했던 새떼들.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는 듯

집 한 채 갖지 않은 두견이

울음 한 번 울어 주지 않고 휙!

허공을 긋고 멀리 사라진다.

떠나는 것은 새들인데

나만 슬피 회한을 갖는다.

저만치서 가을이 걸어온다.

 

 


 

구연배 시인

전북 진안출생 *1995년 전주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1995년 자유문학 시 추천 완료. <자유문학> 신인상(시) 수상. 시집 <빗방울은 깨져야 바다가 된다> <물의 간극> <몽리몽외(夢里夢外)> <환한 꽃그늘> <사계 그리고 환절기>. 현재 서해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