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고재종 시인 / 북극성을 일별하다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7. 7.

고재종 시인 / 북극성을 일별하다

 

 

별 볼일 없는 일들 때문에

별 한번 보지 못하고 살다가

추석날 고향집 툇마루에 앉아

북두칠성과 카시오페이아자리 사이

북극성, 당신을 일별합니다.

늘 저의 일에 관심을 두시고

언제든지 맞아들일 채비를 마친 채

저를 내려다 보시는 당신의

恒心 아래서 저는 떠돌이였습니다.

아주 어릴 적, 제가 사랑하는 소녀와

늦도록 강둑에 앉아 애너벨 리를 읽고

아예 씨르래기 울음을 연주 삼아

당신을 애너벨 리로 명명했지요.

그 호명 이후 늘 당신은

제가 부자될만하면 가난케 하고

제가 날 것 같으면 어깨를 치시고

제가 연애할 양이면 눈멀게 하셔서

쌀싸라기 같은 그때 그 순결을

호젓이 돌아보게 했지요.

제가 헌 상자며 넝마 등을 가득 싣고

좌우로 낑낑대며 비탈길을 오르는

굽은 등허리의 리어카꾼 노인처럼

생을 낑낑대며 끌어대다 돌아와

이제 이렇게 당신께 고백합니다.

애초에 당신을 함께 호명했던 소녀마저

이젠 남의 여자가 된 지 오래라고.

 

 


 

 

고재종 시인 / 사인(死因)

 

 

세상에 아름다운 시신은 없다고 한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부검의 박혜진 씨는 다만

사회가 외면하는 시신의 침묵을

묵묵히 대변할 뿐이라며 웃는다

부검 날엔 몸에 배는 부패 냄새 때문에

밖에 나가 점심도 먹을 수 없는 그녀가

토막 난 사체의 위장을 가르고

썩어 문드러진 사체에서 피를 뽑고

유괴 후 숨진 아이 부검 때는 펑펑 울기도 한단다

하지만 그녀가 고독과 죽음을 관통하며

그토록 밝히고자 하는 사인은

저마다에게 어떻게든 있긴 있는 것일까

마음대로 처치할 수 있는 하인이 없고

공포를 휘두를 제국이 없어서 자신을 증오하는

우리들의 너무도 의당한 천국에서

우리들의 죽음은 스스로 저당 잡힌 게 아니던가

인간에 대한 예의

그 관대한 거짓말 때문에

오월 강변의 미루나무 이파리들이

보석처럼 짤랑거린다는 말도 있는 것이다

 

 


 

 

고재종 시인 / 성숙

 

 

바람의 따뜻한 혀가

사알작,우듬지에 닿기만 해도

갱변의 미루나무 그 이파리들

짜갈짜갈 소리날듯

온통 보석조각으로 반짝이더니

 

바람의 싸늘한 손이

씽 씨잉, 싸대기를 후리자

갱변의 미루나무 그 이파리들

후둑후두둑 굵은 눈물방울로

온통 강물에 쏟아지나니

 

온몸이 떨리는 황홀과

온몸이 떨리는 매정함 사이

그러나 미루나무는

그 키 한두자쯤이나 더 키우고

몸피 두세치나 더 불린채

 

이제는 바람도 무심한 어느날

저 강 끝으로 정정한 눈빛도 주거니

애증의 이파리 모두 떨구고

이제는 제 고독의 자리에 서서

남빛 하늘로 고개 들줄도 알거니

 

 


 

 

고재종 시인 / 세월의 여자

 

 

경상남도 고성군 하이면의 상족암에

때아닌 겨울비 치는 바다,

파도가 고래 떼처럼 몰려온다 말한

그녀는 거기 홀로 견디는 거다.

그녀와 거기서 좀 지체해도 좋았던 그곳엔

백악기 때의 공룡 발자국과

만권서 쌓은 듯한 퇴적암에 층층 새겨진 세월,

그것과 함께 그곳에선

그녀 가슴에 패인 삶의 사랑의 상처도

빗물 고이는 공룡 발자국처럼 오래

가리라는 것을 짐짓 모른 체해야 한다.

몇 번이고 숨이 턱턱 막혀

그 가슴의 울혈, 퇴적암처럼 더께 얹고 나니

고독은 삶에 대한 경건한 수절이더라며

그녀는 오연한 눈빛이던 거다.

어쩌면 그녀는 일억 년 전까지는 추억되는

무상의 시간들을 보았는지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또 만권서보다 더한 것들을

세월 밖에까지 쌓고 싶은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람이 조금만 일어도, 바다가

고래 떼처럼 몰려온다고 말한 것도 그녀다.

난 비 아니라도 온통 젖어 그만이던 거다.

 

 


 

 

고재종 시인 / 수선화 그 환한 자리

 

 

거기 뜨락 전체가 문득

네 서늘한 긴장 위에 놓인다

 

아직 맵찬 바람이 하르르 멎고

거기 시간이 잠깐 정지한다

 

저토록 파리한 줄기 사이로

저토록 환한 꽃을 밀어올리다니!

 

거기 문득 네가 오롯함으로

세상 하나가 엄정해지는 시간

 

네 서늘한 기운을 느낀 죄로

나는 조금만 더 높아야겠다

 

 


 

고재종(高在鐘, 1957~ ) 시인

1957년 전남 담양에서 출생. 담양농업고등학교 졸업. 1984년 실천문학사의 신작시집 <시여 무기여>에 시 <동구밖집 열두 식구>를 발표하며 등단. 시집으로 <새벽 들><사람의 등불><앞강도 야위는 이 그리움> <바람 부는 솔숲에 사랑은 머물고>, <쪽빛 문장> 등이 있고, 수필집에 <사람의 길은 하늘에 닿는다>가 있다. 제16회 소월시문학상 대상을 수상. 제11회 신동엽 창작기금 받음. 민족문화작가회의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