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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지향 시인 / 아침햇빛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7. 12.

김지향 시인 / 아침햇빛

 

 

비늘을 털고 살아나는 말들이

문빗장을 풀고 들어와 앉는다

창밖의 허리 굽은 느티나무 팔뚝에

목이 트인 서리까마귀 빨간 목청들이

대롱대롱 매달려있다

간밤에 싸움을 걸던 검은 오뇌의 줄기,

쇠 방울로 등솔기를 때리고 재빨리

머릿속에 뿌리내린 그 어둔 줄기를

뜯어내 버리고

나는 손가락을 펴들고 금가루를 뿌리는

햇빛의 머리칼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거리엔 선잠 깨어 연지 찍은 가랑잎을

초롱초롱 유치원 아이들 소리가 뒤덮고 있다

무거운 시대를 메고

세상 깊이를 재고 있는 그대들의

쳐진 어깨 위로

황금빛 꽃비가 된 가을이

뚝, 떨어져 아침 햇빛 속에

나부끼고 있다

 

 


 

 

김지향 시인 / 안개

 

 

네가 날아간 빈 공간은 복통이 났다

하늘이 뒤흔들려 눈물 같은 살비늘이

주루룩 내렸다

비늘을 받아먹은 땅

입이 벌어진 틈으로 올라오는 안개,

모락모락 안개는 올라와

내 눈을 가렸으면 좋겠다

몽롱한 안개처럼 너를 잊었으면

좋겠다

 

 


 

 

김지향 시인 / 애니메이션 2

움직이는 TV

 

 

벽에서 티뷔가 걸어 나온다

액자에 담긴 유기질의 파도소리가

액자를 박차고 허공에 쏟아 부어진다

 

허공에서 물고기 헤엄치는 소리가

지상으로 길을 낸다 허공을 메운 소리들이

땅에서 하늘로 조롱박 같은 티뷔를 만든다

 

가장 높이 뜬 티뷔 집에서 소리 한 소쿠리씩

깍깍 짖어대며 머리를 부딪치며 뛰어가고 뛰어온다

소리는 동동 공기로 줄타기하며 온 하늘에 티뷔를 걸어놓는다

머리를 부딪칠 때 마다 몸 한 채씩 만들어지는 소리 집

까치 떼를 키운다

 

아이들은 크게 연 입으로 까치 떼가 부려놓은 소리에

입을 댄다 입 속으로 국수처럼 소리가 빨려 들어간다

소리를 마신 아이들이 티뷔가 되어 쑥쑥 자란다

티뷔 전체에 말이 헤엄친다 기어간다 달리기한다

 

말이 내 머리 속에서 사람들을 만들며

자꾸 스물거린다 한 두름의 사람들이

불쑥불쑥 밖으로 튀어 나간다 온몸이 소리인 티뷔

깔깔깔 웃음을 쏟아 붓는 소리를 익혀 사방에

나무들이 울긋불긋 열매들을 내놓는다

 

 


 

 

김지향 시인 / 어느 날의 경주

 

 

바람이

다 몽그라진 갈퀴를 세우고

빼 마른 다리로 허공에서 뛰어 내린다

사람들은 소름을 쓸며 도망간다

번쩍번쩍 금빛을 뿌리는 뇌성이 길을 열어준다

한 꼭지의 구경꾼도 없는 길엔

허리 구부린 가로수 잎만 까르르 무너진다

뇌성보다 앞선

시퍼런 칼날을 휘날리며 번개가

머리 위에서 바람과 칼싸움을 한다

경주가 끝날 때쯤 덩그렁 아랫도리만 남은

바람이 가로수 뒤로 아랫도리를 감춘다

 

힘껏 달아나며 온 땅에 얼룩처럼 눈발을 늘어놓은

바람 아래 떨어진 나뭇잎 밑에서

내 발만 희끗희끗 배를 깐 겨울을 신고 달린다.

 

 


 

 

김지향 시인 / 어둠 건너 하얀 마을

 

 

저어새가 물을 쪼다 솟아오른다

팽팽한 공기가 퐁,뚫린다

놀라 깬 하늘이

노끈처럼 뚝, 끊겨 올라간다 아득히

 

미쳐 하늘에 발을 넣지 못한 바람은

서로 부딪쳐 깨진다

바람조각들이 땅에 떨어진다 가득히

 

하얀 길, 하얀 사람, 하얀 연못,

 

채집해 놓은 하얀빛을

바늘을 쥔 햇살이 박음질한다 촘촘히

 

[연못가 꽃밭 속 예배당 아래

말씀으로 씻긴 하얀 마을 하나]

 

저 꽃을 밟지 않고도

이 어둠을 건너서 갈 수 있을까.

 

 


 

 

김지향 시인 / 어제와 내일 사이

 

 

어제는 지붕 서까래 아래 참새가 곤한 잠을 눕혔다

밤새 후끈거리는 바람이 서까래를 들락거리며

참새의 잠을 헝클어놓았다 참새는 새끼들을 거느리고

허공에 까맣게 점을 찍으며 허공 밖으로 날아가고

까맣게 타버린 어제는 도마뱀 꼬리처럼

잘린 꼬리를 두고 사라졌다

 

꼬리 잘려 넘어온 갈 곳 없는 어제의 꼬리위에

시간은 또 다시 둥지를 튼다

다시 햇볕을 쏟아 부어 날을 빚는다

달랑달랑 미루나무 잎이 종을 치는 서까래 너머

대밭 너머 키 낮은 뒷산 사철 푸른 솔숲에

멈추어있는 햇볕이 바람에 쓸려 옆으로 길게

퍼졌다 오므렸다 온몸운동 한다

 

(북적대던 삶의 건수들은

가닥가닥 채 썰고 버무려

실타래처럼 뒤얽힌다

날것 채로 지붕 밑에 들어가 묻혀버린다

지붕 위로는 심심한 시간이 후끈거리는 바람에

몸 전체가 익어간다)

 

까맣게 타버린 시간을 물고 참새가 날아간 하늘 서쪽은 마침내

온몸 운동하던 해가 마지막으로 가서 닿는 그늘 깊은 산기슭

댕기머리 속으로 오늘이 쏙 내려가면 동강난 꼬리를 잡고

내일은 또 다시 돋아 오른다

시간은 연속극처럼 날을 만들어낸다

 

(요즘 어제와 내일 사이는 후끈한 바람뿐이지만.)

 

 


 

김지향(佑堂 金芝鄕) 시인

1938년에 일본 규수에서 출생. 그후 경상남도 김해와 양산에 정착하여 성장. 6.25후 홍익대학교 국어국문학를 졸업, 단국대에서 문학석사와 서울여자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 시집「병실」「막간풍경」「사육제」등 25권과 시선집「살아서 노래하는 강물」「바람이 돌아온다」「김지향 99선」「김지향 시선집」, 에세이집「바람과 연기」외 다수, 시론집「한국현대여성시인연구」외 학술 논문 20여편과 화갑기념문집「내일에게 주는 안부」, 50년 기념문집「김지향의 시세계」「나뭇잎이 시를 쓴다」등 많은 저서를 펴냄. 단국대, 홍익대, 한세대 등에서 국문학을 가르쳤고 한양여대 문창과 교수. 시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박인환문학상, 윤동주문학상, 한국시인정신상, 한국민족문학대상 등 많은 문학상 등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