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창수 시인 / 비석거리
누렁소가 된똥을 싸며 집으로 돌아가던 여름날 저녁 이기권과 친구들이 비석거리를 지나가던 여학생들을 둘러쌌다. 무서워서 울음 터트리던 여학생들과 달리 용감한 여학생 하나가 남학생들의 포위를 뚫고 잽싸게 달려가서 논밭에서 돌아오는 마을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멀리서 마을 사람들이 쫓아오자 남학생들이 놀라 도망 쳤다. 친구들은 저만 살겠다고 도망가고 발이 느린 이기권이 맨 뒤로 쳐졌다. 이기권이 큰소리로 친구들을 불렀지만 힘을 다해 도망치는 친구들과 거리가 점점 벌어졌다. 마을 처녀들을 희롱한 놈들을 잡으러 가던 빨간 오토바이가 다가왔다. 이제 죽었구나! 생각하는 찰라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이놈들아 거기 서! 이기권이 친구들을 향해 고함을 쳤다. 빨간 오토바이가 이기권에게 용감한 젊은이라고 칭찬하며 지나갔다. 이놈들아 거기 서! 바퀴에 살이 통통하게 오른 자전거가 지나가면서 이기권에게 사내답다고 했다. 지쳐 기어가다시피 도망가는 이기권에게 동네 노인들이 경운기에 타라고 했다. 얼떨결에 경운기에 올라 탄 이기권에게 노인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논으로 산으로 도망 친 친구들은 잡히지 않았다. 빨간 오토바이와 자전거가 씩씩거리며 돌아왔다. 이렇게 마을 사람들이 한 마음으로 동네 처녀들을 지켜냈으니 막걸리나 한 사발 하자고 이장이 나섰다. 용감한 여학생이 고개를 꺄우뚱하며 이기권을 바라보았으나 시치미를 떼고 어른들이 따라주는 막걸리를 마셨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이기권이 아카시아 향기 날큼하게 날리는 비석거리를 지나 집으로 돌아올 때 깔깔깔깔 여학생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고 했다. 군에서 제대한 후 비석거리에 사는 처녀와 결혼한 이기권은 아내가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볼 때가 가장 무섭다고 했다.
웹진 『시인광장』 2011년 7월호 발표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강해산 시인 / 아름다운 당신은 외 4편 (0) | 2020.07.12 |
|---|---|
| 김지향 시인 / 아침햇빛 외 5편 (0) | 2020.07.12 |
| 한창옥 시인 / 백색소음 (0) | 2020.07.11 |
| 남유정 시인 / 엄마는 지금 노을빛 하늘 (0) | 2020.07.11 |
| 정윤천 시인 / 팔랑, 흰 나비의 집 (0) | 2020.07.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