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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지향 시인 / 잊어버린 길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7. 15.

김지향 시인 / 잊어버린 길

 

 

오늘은 길이 멀어져 간다

마음 안을 한 바퀴 도는데

수십년이 걸리더니

수십년이 초시간의 흔적만 남겨놓고

길은 이제 떠나간다

 

내 안에서 구불텅거릴땐

생나무 타는 냄새를 풍기더니

타는 생나무 냄새가 몸 밖으로 퍼져나오더니

가깝고도 불편한 관계로 마음 베어내더니

이제 떠나가는 네 뒷모습을 본다

 

(수십개의 길이 일시에 빠져나가는,

복면을 한 한 꼬챙이의 길은 자꾸 뒤돌어보는,

내 요소를 너무 많이 끌고 가는지

삶 전체가 무너져내리듯 아찔하는)

 

길이 가서 닿는 모퉁이에선

하늘이 열리고 스르륵, 별이 미끄러진다

별도 삶이 있는가

별도 궤도이탈을 희망하는가

 

나도 이제 그만 내 궤도에서 이탈하고 싶어

궤도 하나씩 잊어버리기로 했다

살점이 내린 뼈를 잊어버리고

심장이 녹은 가슴을 잊어버리고

동공이 빠진 눈을 잊어버리고

 

휴지처럼 낡아서 가버리면

아니오는 길도 잊어버린다

치열하게 잊어버린다.

 

 


 

 

김지향 시인 / 전자파의 탐지

 

 

내 눈은 끝도 없이 치근대는

전자파를 감추고 있다

전자파는 먼데서도 그의 내부 구석구석을

손이 닿지 않는 몸의 세포 속까지 탐지해낸다

 

그의 심장 밑바닥에 잠자던 추억이

목에 푸른 힘줄을 세워 쳐들고 나옴을

그 추억 한 잎씩 베어져 나감을

베어져 나간 자리에 새 추억의 싹이

나고 있음을 탐지해낸다

 

어느 날 문득

몸 전체를 열고 나가

우주 안 밖을 유영하며

하늘 위의 하늘에서 전송되는 말씀을

전 생애를 부어 지상에 뿌리는

순결한 우슬초의 그 영혼도 탐지해낸다

 

그러나 전자파는

맘대로 육체를 뚫고나가 하늘 한 바퀴 돌며

그의 영혼을 우주 밖으로 분산시켜놓고

귀환하는 나의 입자들이 당돌한 육체 조립 술로

그와 나를 바꿔치기하는 이 위험한 장난기를

왜 탐지해내지 않는지?

 

 


 

 

김지향 시인 / 종이학

 

 

발코니 쪽문을 열고

내가 빚은 종이학 몇 마리 내보냈다

조여맨 벨트를 풀고 핵가족이 된

학들은 먹어도 먹어도 다시 돋아나는

공기로 배를 채우며 하늘 높이 흩어졌다

 

하늘 바다를 받치고 있는

햇살의 수정그물을 끊고

잔등이 한번 반짝 빛을 내더니

모두는 일시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어느 첫 새벽

서리 위에 지친 다리를 얹어놓고

아직 덜 깬 잠에 기대앉은 먼지만 시커먼

열등 새 한 마리는

불이 붙은 첫차의 눈에 붙잡혔다

새는 차량이 뿜어내는 기세등등한

기계음에 놀라 날개를 몇 번 삐걱거렸다

나는 다친 날개를 실로 싸매주었다

새는 푸른 물감통인 하늘 가슴을 향해

연기 같은 빗금 한 줄 남겨놓고

푸드득 푸드득 종적을 감추었다

 

발코니 쪽문을 떠난 종이학 몇 마리

떨어진 열등 새 까지도

어서어서 제 발로 날아서

문 닫히기 전 하늘의 비밀궁전에 들어가

생명을 주는 전능자의 품에

안겼으면 좋겠다

 

 


 

 

김지향 시인 / 죽음은 살아서 돌아온다

 

 

너는 언제부터 나의 두려움이 되었니

 

발 앞에서 절벽이 무너진다

눈 옆에서 고목뿌리가 뽑힌다

이마 위에서 공기 알갱이가 쏟아진다

무너지고 뽑히고 쏟아지는 그림이

심장 절반을 깔고 앉는다

 

긴 목 긴 다리 긴 팔뚝으로

너는 나를 무너뜨리고 뽑아내고 쏟아내는 폭력으로

지나온 길을 슬쩍 지워버린다

나의 디카 폰에도 안 잡히는 정체불명의 너에게

나는 문자 메시지를 보내지만 한번도 답전이 없는

너는 멀쩡하게 살아서 내 손을 잡는다

 

너는 언제부터 나의 그림자가 되었니

 

오늘은 얼어붙은 하늘 난간에서 미끄러지는 요술쟁이가 된다

어디든 닿는 곳은 많아도 자신에겐 닿지 않는 변신술의 귀재

긴 팔 긴 다리의 경주자 1초에 우주 끝을 돌아오는 투명 로봇

백두산에서 한라산으로 하늘마루에서 땅 밑으로

발이 닿기만 하면 죽음을 흘리는, 겨울엔 너무 자주 흘려

몸이 종잇장처럼 가볍지만 너무 가벼워 보이지 않는

너를 나는 뒤꿈치만 스쳐도 왜 몸이 으스러지도록 두려운지

 

이 겨울을 끌고 어둠의 계곡으로 가지만

너는 침묵에만 닿을 뿐 죽음인 너에겐 닿지 않는다

네 손아귀에 쥐어지는 살아있는 사물 모두는

죽음에게 넘겨주고 너는 혼자 살아서 유유히

돌아온다 나의 그림자로

 

 


 

 

김지향 시인 / 지리산 바람소리

 

 

지리산 중턱을 오른다

올라갈수록 깊어지는 계곡이

살 속에서 살아있는 것들을 꺼내놓는다

파란 손을 팔랑이며 찔레나무 가지가 불쑥 고개를 내민다

오래된 노송나무는 거느린 새 식구들과

팔짱을 걸고 영토 넓히기를 서두르는 중이다

사철 얼굴 붉은 단풍나무는 부끄러운 듯

땅으로 고개 숙이며 마중 나와 서 있다

솔방울 같은 열매를 머리에 인 구상나무는

활짝 팔을 펴 하늘을 안고 있다

식구를 늘이지 못한

굴참나무 개암나무 도장나무들 사이로 들락거리는

휘파람새가 진종일 구슬이 뛰어가는 휘파람으로

계곡의 정적을 깨우고 있다

 

나무들의 발치께에 드문드문 밥풀처럼 흩어져있는

산꽃들 머리 위로 이따금 서늘한 바람이 스쳐 가면

한나절 햇볕도 들어왔다 바스러져 날아가 버리는,

절로 따라 들어온 시간도 나뭇가지에 걸려 퍼덕거리다

죽어버리는 뱀사골 중턱에선 심장을 두드리는 북소리 같은

징소리 같은 물소리 같은 신음소리가 떠돌다 간다

오랜 기억 속에 맴도는 젊은 혼령들이 아직도 저승에 가지 못해

깊은 계곡 중턱에 앉아 그때의 울음을 울고 있는지

한 곡조 원혼가가 무겁게 날고 있다

억새소리도 같이 우렛소리도 같이 무거운 발걸음을 남겨두고

이쯤에서 하산하는 지리산 바람소리.

 

 


 

 

김지향 시인 / 진눈개비 한 가락 찍다

 

 

억새 밭엔 억새는 없고 얽힌 머리칼들이 성이나 있다

자지도 않고 한눈도 팔지 않고 기가 펄펄 살아서

무더기무더기 스크럼을 짜고 팔목을 잡아끌며

아래위 옆으로 도리질을 하고 있다

온 들판에 마른 몸을 들어낸 채 달려가는

칼바람에 철철 살이 훑이고 있다

 

(사람들의 카메라 속에선 거꾸로 서서

살살 눈웃음을 치고 있어 한 움큼 말아 쥔

내 손이 부드러워진다)

 

바람이 나뭇가지에 걸려 한 잠 자고 난 밤

내 카메라 눈이 한 눈도 감기지 않은 밤

카메라 눈에 빗금을 긋고 기다란

진 눈개비 한가락 지나간 밤

카메라를 접어 넣기 아까운 밤

 

밤을 가로질러 진눈개비 몇 줄기 열차처럼 지나간다

우주의 손이 진눈개비 창고를 놓쳐버렸는지!

 

 


 

 

김지향 시인 / 컴퓨터와 아이

 

 

고층 아파트 발코니에서

아이 하나 찻길을 보고 있다

 

줄자 같은 길에 발이 묶여

줄줄이 끌려가고 끌려오는 차량들이

먼지를 싣고 와서 찻길 가득히 부려 놓는다

 

찻길이 먼지를 모두 삼킬 동안 지켜본

아이는 창밖으로 빨대를 내밀고

비눗방울 총을 쏘았다

아이의 풍경이 깨졌다

 

안개 같은 물방울이 동그란 하늘을 만들었다

아이의 하늘 속 바람이 몰려와

놀라 빠진 가로수 머리칼을 쓸어 갔다

 

벌거숭이 세상이 되었다

 

햇빛이 톡, 톡, 바스러지고

공기가 퐁, 퐁, 구멍이 난 찻길

손뼉을 치며 좋아하는 아이가

구멍 속으로 세상을 본다 그때

문득 차량들이 튀어나와 찻길을 베어 먹으며

또 다시 먼지를 깔아놓는다

뿌옇게 먼지 옷을 입은 세상을

 

뚫어지게 노려보며 실망한 아이는

컴퓨터를 열고 뚫린 공기의 구멍 속으로

손을 내밀어 살아난  차량 하나 하나

인터넷 감옥 속에 마구 잡아 넣는다

 

인터넷 찻길엔 차량이 살아나지 않았다

 

 


 

김지향(佑堂 金芝鄕) 시인

1938년에 일본 규수에서 출생. 그후 경상남도 김해와 양산에 정착하여 성장. 6.25후 홍익대학교 국어국문학를 졸업, 단국대에서 문학석사와 서울여자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 시집「병실」「막간풍경」「사육제」등 25권과 시선집「살아서 노래하는 강물」「바람이 돌아온다」「김지향 99선」「김지향 시선집」, 에세이집「바람과 연기」외 다수, 시론집「한국현대여성시인연구」외 학술 논문 20여편과 화갑기념문집「내일에게 주는 안부」, 50년 기념문집「김지향의 시세계」「나뭇잎이 시를 쓴다」등 많은 저서를 펴냄. 단국대, 홍익대, 한세대 등에서 국문학을 가르쳤고 한양여대 문창과 교수. 시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박인환문학상, 윤동주문학상, 한국시인정신상, 한국민족문학대상 등 많은 문학상 등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