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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지향 시인 / 차표 없이 온 봄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7. 16.

김지향 시인 / 차표 없이 온 봄

 

 

차표 없이도 불쏘시개 한 장으로 개찰구를

빠져나온 봄 한 덩이

마중 나온 뾰루지 같은

봉오리들에게 화덕 한 통씩 안겨준다

봉오리들은 일심으로 화덕에 불을 붙인다

지나가는 바람 한 필 끊어와 살 살 살

화덕 앞에서 밤 내 부침개를 뒤집는다

 

해가 하늘 기슭에 얼굴을 내민 뒤에야

뒤집힌 자기 몸을 본다

불침번으로 지켜준 나무에게 손을 흔들며

빵긋, 봉오리를 깨고 나온 진달래

만산에 활짝 불을 피운 봄 아침

녹슨 추억은 뒤로 밀리는, 햇살이 똑똑

부러지는 빳빳한 젊음을 산새들도 아직은

어리둥절 구경만 한다

 

 


 

 

김지향 시인 / 청소하는 날

 

 

허공에 비를 갖다댄다

오른뺨 왼뺨 돌려가며

바람이 허공을 긁어낸다

 

해가 반짝 눈을 뜨다가 배경으로 나앉는다

몇 묶음의 비를 움켜쥔 바람이 우주로 올라간다

 

쏴~~ 쏴~~먼지가 쏟아지는 블랙홀

온몸이 비가 된 바람이 마주 버티고 선다

 

바람이 내준 길로 먼지에 갇혀있던

우주선이 떠난다 제비처럼 미끄러지며

지상정거장으로 귀환한다

 

허공에 안보이던 길이 햇빛을 데리고

지상으로 온다 드디어 환한 세상

나도 마음에 난 길을 닦는다

 

마음의 잎사귀에 앉은 해묵은 딱지를 뜯어낸다

세상을 통째 갖고 싶었던 허욕이 알갱이 채 떨어진다

나에게 안보이던 내가 유리 속처럼 보인다

 

이제 눈을 뜨고 하늘을 쳐다봐도 되겠다

 

 


 

 

김지향 시인 / 청조 우주 밖에서 다시 사는

 

 

뒤돌아보면 달려갈 길 다 갔는지

아픈 세월들이 잠시 발을 멈추고

신발을 벗어 털고 있네

 

보이네 얇은 망사 울타리 너머

힘겹게 엮어논 휑한 허공에

힘겹게 달려온 세상 선수들이

먼저 가려고 신발도 벗어들고

새치기로 달려가더니 어느새

훌쩍, 뛰어넘은 울타리

망사천 밖에서 환히 보이네

 

기쁨과 슬픔이 덩어리로 찌들은

옷가지 벗어 청정한 물에 씻어 말리며

피범벅으로 얼킨 발가락 치료하는

삶을 마친 선수들,

울 밖 시간을 깡그리 잊어버린

망각훈련에 익숙해진 선수들이

나이를 한 올 한 올 뽑아내고

초록잎 수액을 약방울처럼 뿌려 넣고 있네

 

다시는 늙음과 그리움과 고통과 슬픔을

겪지 않을 풀빛 청조로

하늘 너머 우주 전체에 집 짓고

넓게 편 날개로 헤엄쳐 다닐

가장 깨끗한 생명으로 다시 살

세계가 영원처럼

그렇게 펼쳐진 들판이 보이네

이제 점점 가까이 보이네

보이네

 

 


 

 

김지향 시인 / 초롱불 진달래

 

 

삭둑삭둑 키를 잘라낼 땐

피 한 방울 안 나던 진달래

오늘 아침 창문을 열고 보니

꽃분홍 선혈을 뒤집어쓰고 있네

 

조금씩 가지를 쳐낼 땐

신음소리 한 마디 안 내던 진달래

오늘 아침 물주다 보니

 

빨갛게 켜든 초롱불 속에

마디마디 아픔이 웅크린

눈물을 감추고 있네

 

초롱불 한 잎 한 잎 만지작거리다

돌아선 나의 등뒤에서

진달래 아픈 비명소리가

딸,딸,딸, 신발을 끄을며 따라오네

 

 


 

 

김지향 시인 / 초봄의 귀밑머리

 

 

방금 머리 내민 봄

햇빛을 만져본다

빛꼬리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

풀밭에 뒹군다

 

햇빛의 발이 콩.콩,콩,

자국을 찍는 풀잎마다

연두빛 얼굴이 된다

 

봄의 빛은 발이 간지럽다

 

(손으로 움켜잡으면

몸이 가루되어 먼지처럼 날리지만)

햇빛이 빗금을 그은 곳마다

아지랑이가 죽어버린다

아지랑이 뒤에 머리를 숨긴

풀이 쏘옥. 쏙 혀를 내민다

 

보들한 바람에

파란 혀를 날름대는 풀

초봄의 귀밑머리가 내 뺨에서

파르랗게 나팔댄다.

 

 


 

 

김지향 시인 / 추억에게 안녕

 

 

사랑, 하고 마침표를 찍으면

절망처럼 암담했던 시대가

내 눈썹 끝

내 가슴 귀퉁이에 일어선다

절망의 시대 너머

기억의 갈피에서

이미 형체도 사그라진 사랑이

존재함! 하고 손을 치켜든다

호롱불보다 밝은 촛불 밑에서도

도저히 안 보이는

먼지가 한 줄 파르르 기억 밖으로 날아갈 뿐

 

떴다 가라앉았다 하는

한잎의 무지개가

내 옷깃 속엔 언제 들어왔나

커다란 자리를 차지하고

빛나지 않은 괴로움 한 줌 만들어내며

때론 빛바랜 학이 되어

눈을 깜박거리며

미래에게 주는 나의 안부를 질투하며

 

나를 거쳐간 시간에게도

안부를 보내주기 바라며

위험한 감각과 빈틈없는 행복을

누리고자 한다.

그래, 나의 기억 안에서만

완벽하게 빛나고자 하는

추억에게도 안녕.

하고 마침표를 찍으면

절망처럼 암담했던 시대가

불빛보다 더 밝게

살아남을 본다 분명히.

 

 


 

 

김지향 시인 / 푸른 땅을 걷는다

 

 

푸른 물이 든 푸른 땅을 걷는다

나의 실눈으로 들어오는

숲들의 잎과 잎이

안개도 구름도 걷힌 얼굴로

밝게 웃는다

안개도 구름도 없는 얼굴 아래로

아이들이 솔방울처럼 굴러간다

 

고궁의 5월은

땅도 사람도 7활이 풀빛이다

세상의 잡음이 들어와 보지 못하고

매연도 먼지도 따라와 앉지 못하는

아이들의 새파란 눈 속으로

커다란 호수를 몰고 애기 바람이 달려온다

 

바람이 조그맣게 담겨있는 호수 속엔

내 유년의 얼굴이 돋아나

자꾸자꾸 아이들 얼굴에 겹쳐 눕는다

아이들 입 속에서 새소리가 뛰어나와

내 해묵은 머릿속 체증을 씻어 내린다

아~ 하고 오랜만에 질러보는 함성

어느새 나도 푸른 몸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김지향(佑堂 金芝鄕) 시인

1938년에 일본 규수에서 출생. 그후 경상남도 김해와 양산에 정착하여 성장. 6.25후 홍익대학교 국어국문학를 졸업, 단국대에서 문학석사와 서울여자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 시집「병실」「막간풍경」「사육제」등 25권과 시선집「살아서 노래하는 강물」「바람이 돌아온다」「김지향 99선」「김지향 시선집」, 에세이집「바람과 연기」외 다수, 시론집「한국현대여성시인연구」외 학술 논문 20여편과 화갑기념문집「내일에게 주는 안부」, 50년 기념문집「김지향의 시세계」「나뭇잎이 시를 쓴다」등 많은 저서를 펴냄. 단국대, 홍익대, 한세대 등에서 국문학을 가르쳤고 한양여대 문창과 교수. 시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박인환문학상, 윤동주문학상, 한국시인정신상, 한국민족문학대상 등 많은 문학상 등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