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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향 시인 / 푸른 수혈
한낮 공중에 목매단 봄을 딴다 철없는 손이 놓아버린 꿈
빨간 봄을 베어 문다 공기의 배가 펄럭인다 꽃잎이 차르르 흐른다 피다만 봉오리까지 온통 내 몸에 붉은 피를 수혈한다
힘줄이 파랗게 돋으라진다 새파란 잎이 화들짝, 몸을 열고 나온다
여름이 세상을 덥석, 깔고 앉는다
김지향 시인 / 하늘에 말 걸기
잠시 소나기 그치고 번쩍이는 번개만 달리고 있다 겁 많은 사람들은 단단히 걸어 잠근 마음문의 열쇠를 찾는다 나는 번개가 인화된 창문의 그림자 앞에 마음 문을 연다 다급히 마음에 신발을 신긴다 갈 곳을 찾다 번개가 불꽃을 꽂는 전깃줄에 내 눈만 꽂는다 전깃줄이 불자동차 소리를 내며 목 놓아 울어댄다 빳빳이 신경을 세우고 있는 플라타너스 가지가 땅에 이마를 찧는다 놀라 뛰는 플라타너스 눈은 어디다 흘렸는지 몸만 사정없이 흔든다 나도 눈을 하늘의 불자동차에 넣어두고 이마는 창문 밑에 패대기친다 하늘이 빨갛게 불이 났는데 다시 또 내리기 시작한 소나기는 하늘 불을 끄지도 못한다 하늘은 눈 하나로 세상 전체를 밝히 본다 나는 내 귀에도 들리지 않는 소리로 이제 그만! 하고 거푸 소리 질러본다 내 소리는 말이 되지 않는다 말이 되지 않는 말이 몇 만 리를 걸어야 하늘마음에 닿을까 ( 태초의 적요 속에서 처음 태동한 하늘마음) 그 마음을 하늘은 끝도 없이 땅으로 보냈지만 하늘의 마음을 알지 못한 사람들이 다급하게 오늘에서야 하늘에 말을 걸어본다 대답 없는 하늘에서 내려온 불자동차 소리 하늘 말을 듣지도 못하는 사람들은 소리가 인화된 창문에 엎어져 눈을 감싸고 한밤 내 부들부들 떨기만 한다
김지향 시인 / 하늘은 편지지
나는 날마다 하늘편지지에 편지를 쓴다 내 새파란 사연을 평생토록 쪼아 먹은 하늘 살갗이 파랗게 잉크물이 들었다 하늘치마가 출렁출렁 나부낄 땐 내가 쓴 푸른 고통이 다 헤진 휴지 같은 사랑이 푸르른 희망으로 각색된 답장 한 묶음이 되어 종이 비행접시처럼 날아온다
하늘은 푸른 씨를 모종하지 않아도 편지 받는 사람의 가슴마다는 푸른 싹이 돋는다 푸른 잎이 팔랑이는 창마다 하늘 편지지에 한밤 내 쓰고 받은 답신 한 장의 꿈이 팔랑팔랑 손을 흔들고 있다
(때론 임자 없는 신발처럼 떨어져 나뒹구는 편지도 있다)
나는 때때로 찾아가는 옛집의 팽나무 살갗에 오늘 열매처럼 오돌오돌 돋아난 푸른 희망의 글귀 몇 점 먼지에 덮여 자고만 있는 종이 비행접시 한 장 읽는다 저 네거리에서 손가락으로 하늘에 삿대질만 하던 그가 하늘로 수납된 지 이미 오래되었음을 (하늘은 가끔 송신에 답신 없는 사람은) 그 날로 벽난로 끄듯 말끔히 회수해감을 읽는다
오랜 세월 내 귓바퀴를 돌며 고막을 씹던 바람의 푸른 송신음 접혀진 하늘 한 귀퉁이가 발신처임을 이제야 이제야 읽는다.
김지향 시인 / 한 됫박의 웃음소리
내가 사는 구로구 고층 아파트, 아직은 칼끝을 내민 겨울바람을 붙잡고 바들바들 떨고 있다 아파트가 떨지 않으면 앞 뒤 공기가 떨어준다 아파트 앞 뒤 세상은 늘 꽉 차 있다 꽉 찬 세상을 향해 날마다 한 두름의 남자와 여자가 뛰어 간다 꽉 찬 길이 비껴주지 않을 때 세상이 스스로 걸어와 주는 아파트 네거리는 한낮 내내 해가 앞을 가로막고 비껴주지 않는다 아파트 네거리 왼쪽은 늘 깊은 그늘에 들어있다 아파트 앞을 오가는 사람의 얼굴은 언제나 똑 같이 기억하지 못한다 맞은쪽 대각선 전방에는 오전 동안만 남자와 여자가 등을 맞대고 건강 체조만 한다 건강을 다지는 사람들로 구로구 노인정에는 나이 많은 젊은이들로 공간을 채운다
이런 때 나는 어린이 놀이터에서 *창준의 미끄럼틀에 매달려 삶을 채운다 나는 숲이 무성하지 않지만 늦게 얻은 열매 한 알, 열매 한 알의 무게가 열매 한 알의 웃음소리가 내 세계를 채운다 멋있다며 장난감 기차를 들고 기차 칸이 지나갈 때마다 손뼉을 치며 구구단을 외우는, 갸웃갸웃 고개로 장단을 맞추며 영어노래도 부르는 골고루 익은 열매 한 알 보듬고 삶 전체를 바친 엄마. 아빠가 오늘은 마주 손뼉을 치며 집안 전체를 흔들어놓는 한 됫박의 웃음소리에 함께 자지러진다
내민 겨울바람의 칼끝도 스스로 무안해 하는 이 겨울 한복판의 따뜻한 우리 집
★창준~두 돌 지난 나의 첫손자
김지향 시인 / 한 쪽 다리의 생기
세상 위에 떠서 지붕에 발을 숨기고 있는 바람 한 쪽 다리에만 발통을 달고 있네
날마다 나뭇가지에 빌딩꼭지에 들판에 마구잡이 그물을 쳐놓고 낡은 찌꺼기 걸러내던 그가 이제 보니 한 쪽 다리가 굳어버렸네 세상이 쏘아 올린 독침에 명중되었는지?
이제 외쪽 다리로 외쪽 하늘을 씻어낸다 외쪽 하늘에 붙은 구름이 하늘 옆구리에서 새파란 생수로 쏟아져 한쪽 세상에만 내리네 하늘 옆구리에서 반쪽뿐인 해가 반쪽 세상만 살려내네
우와! 온 하늘에 매달아 놓은 나의 디카폰엔 없어진 반쪽 세상이 찍혀있네
김지향 시인 / 호숫가에서
집앞의 호수에 담긴 가을의 옆얼굴을 들여다 본다 흠집 하나 없는 거울이다 거울 속엔 털이 다 벗어진 숭어 몇이서 흩어져 있는 풍금소리를 모으고 있다 여름을 떠메고 돌아서는 시간의 손이 붉은 물감을 뿌려놓고 간 뒤로 한쪽 뺨이 붉은 사과알이 내려와 데굴 데굴 덜 찬 속살을 내비치고 한쪽 가슴이 붉은 나뭇잎은 가슴의 붉은 물을 씻어 놓고 있다 붉은 물감으로 생기를 얻은 집앞의 거울은 나의 머릿속까지 뚫고 들어가 때가 좀 끼인 머리 구석 구석을 비추어 어디서 혼자 우는 비를 피한 죄를 드러내고 항상 해가 지는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있는 다 풀린 내 눈꺼풀을 뜯어 내면서 굵다란 회초리로 내 시든 종아리를 때리고 있다
나는 다시 물이 오른 종아리로 가슴을 떨면서 해묵은 헌 죄를 다 털어내고 털어내고 마침내 그 호수 속 생기로 돌아간다.
김지향 시인 / 휴일아침 봄비
봄이 입을 열고 꽃잎을 마구 토해낸다 꽃잎 먹은 봄비가 동 동 동 꽃잎을 져 나르다가 이 아침엔 빳빳이 서서 손뼉만 친다 하늘에 땅에 열꽃을 띄우는 진달래 옆구리 살이 튼 돌 틈엔 아직도 늦잠 든 노르께한 토끼풀이 꼬부라져 있다 일어나라 일어나라 한 주먹씩 꽃물을 먹여주며 흔들고 있는 진달래 치맛귀를 스치는 자전거 요령소리
휴일 아침, 근린공원 일대엔 무단 가출한 로봇 자전거 가족들이 동글동글 줄을 지어 돌며 한 두름씩 꽃잎을 싣고 오래된 내 유년의 꿈 밭을 달리는 중이다 하늘 한 귀퉁이 희미하게 몸을 드러낸 무지개도 드러누울 공간이 없는지 아침 내내 허리 구부리고 서서 로봇 자전거 달리기에 일심으로 손뼉을 쳐준다
지금은 환히 열린 봄 다시 입 다물 날이 멀지 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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