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허정애 시인 / 너는 반박하지 않는다

by 파스칼바이런 2020. 7. 16.

허정애 시인 / 너는 반박하지 않는다

― 격포에서

 

 

  관자놀이에 갖다 댄 네 손가락이 덜 마른 석고 빛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그럴 리가 없어― 손끝에 엉겨붙는 반죽을 떼어내듯 네가 혼잣말을 한다

 

  햄릿의 문제는 무엇에서 비롯되었는가 음울한 상념인가? 유령이 전한 말인가? 호두껍질 안에 웅크리고 있어도 자신을 우주의 주인으로 여길 수 있다는 햄릿, 생각이 문제를 일으키는 질병이라고 한 자연주의자들, 생각이 모든 것을 위로한다는 샹포르의 금언, 코기토보다 차갑고 극단적이고 사심私心으로 가득찬 정념이 있을까? 라고 한 들뢰즈

 

  소요하는 상념이 뒤엉킨 사태의 기원을 찾고, 이면에 놓인 씁쓸한 논리를 알아간다는 것인가

 

  채석강 암벽에 빼곡히 새겨놓은 바다의 문장들, 격포가 답을 줄 것인가

 

  너는 벗은 발에 집중한다 물 나간 자리 포석처럼 드러난 바위에, 하얗게 붙어 있는 석화에, 바위틈을 들락거리는 작은 벌레에, 수면을 스치며 날아가는 갈매기에, 등대로 이어지는 긴 방파제에, 구름 낀 하늘에, 인적 없는 백사장에, 섬처럼 떠있는 바지선에, 출항을 준비하는 고깃배에, 혈관 속으로 번지는 이른 아침 포구의 냄새에

 

  너는 집중한다

 

  그럴 리가 없어― 발밑에서 파도가 부서지는데

 

  안개에 덮인 잿빛 바다는 입을 닫고 무엇을 견디고 있는가

 

웹진 『시인광장』 2011년 9월호 발표

 

 


 

허정애 시인

서울여자대학교 졸업. 1999년 《문예사조》를 통해 등단. 2001년 짚신문학상 수상. 시집『신의 아이들은 춤춘다』(한국문연, 2007)이 있음.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지향 시인 / 푸른 수혈 외 6편  (0) 2020.07.17
홍예영 시인 / 히에라 통신  (0) 2020.07.16
김병호 시인 / 첫눈  (0) 2020.07.16
홍성란 시인 / 엄마 냄새  (0) 2020.07.16
윤효 시인 / 고마운 일  (0) 2020.07.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