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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천외자 시인 / 장미가시에 내리는 눈은

by 파스칼바이런 2020. 6. 29.

천외자 시인 / 장미가시에 내리는 눈은

 

 

  우리가 언제 몸이나 마음을 섞었었니

  머리카락 한 올

  손가락 한 마디라도

  몇 마디 말만 살짝 주고받았을 뿐이지

  그 말이라는 것도 마음 안으로 스며들지 못하고 바람이 휙 부니까

  벼린 가시에 슬쩍 앉았던 눈발처럼 흩어져버렸잖아

  목숨보다 긴사랑

  나보다 너를 더 사랑해

  가끔 이런 눈부신 말이

  마음을 찔러서 따끔거리는 것은 장미 가지 사이에 잠시 끼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시린 눈발 같은 것이겠지

  그 가벼운 말들

  새 봄에 피어날 푸른 장미 잎사귀는 구경조차 못하겠지

  겨울 햇살의 희미한 온기도 못 견디고 날아가 버린 눈

  네 인생에 손댄 것

  아니잖아

  독한 가시에 마구 찔렸다면

  흰 눈발에서도 뜨겁고 붉은 피가 쏟아졌어야지

  그 자리에서 라이너 마리아 릴케처럼 죽었어야지

 

  언제나 한밤중 바다에 내린

  그해 겨울의 눈 그것은 꽃보다도 화려한 낭비였다*

 

*-이형기 시인의 「그해 겨울의 눈」 부분

 

웹진 『시인광장』 2011년 3월호 발표

 

 


 

천외자 시인

경북 안동에서 출생.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2년 《시현실》을 통해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