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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영춘 시인 / 붉은 심장들

by 파스칼바이런 2020. 7. 3.

이영춘 시인 / 붉은 심장들

 

 

  아버지가 키우던 소 여덟 마리를 엄동에 묻었다

  하늘이 쩍쩍 갈라지는 언 땅에

  꿈-벅 꿈-벅 눈 뜨고 우는 소들을 순장하였다

 

  아버지의 어머니를 잃고 아흐레 장을 치르던 장삿날보다

  그 울음소리

 

  흥건하다

 

  씨앗소를 위해 여물 끓이던 가마솥은

  우물우물 여물을 씹던 소들의 눈보다

 

  깊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란 놈은 개선장군처럼 우두커니 소 우리에 내려 와 앉아

  어둠을 파 먹고

  아버지와 소를 송두리째 지우고 간 긴-어둠은

  느리게 느리게 적막을 걸어 나간다

 

  아버지와 소가 순장된 구덩이에서는 연일

  벌건 핏물이 흐른다고 TV화면은 붉은 심장을 꺼내 흔들어대고

  어머니는 화면을 향해 숟가락을 던진 채

  땅바닥에 쓰러진다

 

  전쟁이다

 

  목숨 가진 것들의 마지막이란 이렇게 피 흘리는 일인가

 

  한 치 망설임도 없이 내가 먹었던 살(肉)들이 일제히 일어나

  방안 가득

  붉은 피를 쏟아 낸다

 

웹진 『시인광장』 2011년 5월호 발표

 

 


 

이영춘 시인

강원도 평창 봉평에서 출생. 경희대학교 국문과 및 同 대학원 졸업. 1976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시시포스의 돌』, 『시간의 옆구리』 外 8권과 시선집 『들풀』그리고 수필집 『그래도 사랑이여!』가 있음. 제3회윤동주문학상(한국문인협회)과 경희문학상, 강원도문화상, 대한민국향토문학상, 2009년 제8회 시인들이 뽑은 시인상( 한국시인작가회의.문학아카데미) 등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