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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강순 시인 / 거울의 통증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7. 10.

강순 시인 / 거울의 통증

 

 

내가 당신에게 안착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제부턴 말하지 않겠습니다

오래전에 얼굴을 버렸는지

아침마다 얼굴을 몇 번이나 깼는지

새를 몇 마리 죽였는지

밤을 쨍그랑 깨고 출몰했는지

한낮에도 햇살에 놀라 울었는지

이제부턴 말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오직 미소만 키웠습니다

당신의 눈길을 기다리며

 

그러다가 백 년을 깨어 있어도

지구는 늘 허풍쟁이처럼

인내만을 강요한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나를 돌보지 않았더니

아침마다 새들이 날아오르지 않더군요

껍질을 바닥으로 내버렸더니

떠나가는 새들의 뒷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더군요

 

통증은 통증을 느껴야 통증입니다

나의 뼈가 비틀려도 단단한 근육이 잡아 주면

더 이상 통증이 아닙니다

 

나는 아무에게나 웃습니다

 

계간 『문학과 의식』 2019년 겨울호 발표

 

 


 

 

강순 시인 / 권력

 

 

  내 안의 내가 나를 본다 내 뒤의 내가 앞의 나를 부른다 내 왼쪽의 내가 오른쪽의 나를 듣는다 내 앞의 내가 돌아서서 뒤의 나에게 걸어간다 내 뒤의 내가 앞의 나에게 너는 늙어 버렸구나라고 말한다

 

  내 앞의 내가 뒤의 나에게 머리를 조아린다 내 오른쪽의 내가 내 왼쪽의 나에게 몸을 보여 준다 내 왼쪽의 내가 아이스크림을 빨다가 당황한다 근육을 많이 키워야겠어라고 말한다 내 오른쪽의 나를 지나 러닝머신으로 다가간다 내 앞의 내가 미니스커트를 입은 뒤의 나를 응시한다

 

  나는 세포분열하는 나들을 바라본다 나는 기억 위를 날아가고 나는 배꼽 티셔츠를 입고 거울 앞에 서고 나는 거울 속의 나에게 입술을 내밀고 나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뒤태를 확인하고 나는 붉은 매니큐어를 바른 손톱을 나에게 보여 주고 나는 립스틱을 바른 입술을 뻐끔거리고 나는 거울 속을 또각또각 걸어 애인에게 걸어가고 나는 오후 세 시의 그림자를 확인하며 커피를 마시는데

 

  모든 나는 젊은 나를 바라본다 늙은 나는 젊은 나에게 꾸벅 인사한다 내 왼쪽의 나와 내 오른쪽의 나도 모두 젊은 나에게 인사한다 젊은 나는 내 뒤에서 모든 나들을 조종한다 기억 속에 마녀로 앉아 나 밖으로 나오지 않고 천 년 만 년 산다

 

계간 『시와 사상』 2019년 가을호 발표

 

 


 

강순 시인

1998년 《현대문학》에 〈사춘기〉 외 4편으로 등단. 시집으로 『이십대에는 각시붕어가 산다』와 『즐거운 오렌지가 되는 법』이 있음. 2019년 경기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수혜. 현재 한양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 과정.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