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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수 시인 / 감꽃
1
감꽃 핀다, 어디선가 소식 없는 사람들 편지라도 한 장 날아들 것 같다 사람도 짐도 땟국물이 흐르는 기차 길옆 오막살이 기우고 기웠지만 어딘지 정이 헤퍼 보이는 철망을 달고 옥수수 한 줌 쌀 한 줌 가난을 폭죽처럼 터뜨리던 뻥튀기 할아버지, 잠들어 계신 언덕일까 아지랑이 아지랑이 마술의 주문이 오르고 햇빛에 달궈진 선로 끝 아득히 멀리서 부터 기적이 울리면 뻥, 튀긴 희망에 주린 배를 달래 본적 있나, 설사를 하며 속아본 적 속을 줄 알면서도 튀밥이 튀면 허천나게 달려든 적이 있어 꽃이 튄다, 저만치 떨어져서 귀를 막는다 나를 묻는 땅속 꽃씨 한줌도 성급하게 피어날까 튀밥처럼 뻥 하고 튀어오를까, 귀청이 다 떨어지도록 치밀어오는 그리움, 아그데 아그데 감나무 굶주린 꽃이 핀다
2
감나무 아래 들이 잠에 들고 깊다 떨어진 풋감처럼 떫디 떫은 잠이라도 헤 입벌린 채 빠져들고 싶다 밭일 간 엄마를 기다리는 동안 아가 울지 마라, 자꾸 울면 쐐기가 떨어진다 이파리로 다독다독, 잎바람을 일으켜 자장가를 불려주던 유모의 품속으로 들어가 잠들고 싶다 헤 벌린 입에 젖을 물려주기 위해 받아먹지 못하는 젖을 넣어주기 위해 아래로 축 처져 있던 감나무 가지 아래
손택수 시인 / 감자꽃을 따다
주말농장 밭고랑에 서있던 동업자 장철문형이 감자꽃을 딴다 철문형, 감자꽃 이쁜데 왜 따우 내 묻는 말에 이놈아 사람이나 감자나 너무 오래 꽃을 피우면 알이 튼실하지 않은 법이여 꽃에 신경쓰느라 감자알이 굵어지지 않는단 말이다 평소에 사형으로 모시는 형의 말씀을 따라 나도 감자꽃을 딴다 꽃 핀 마음 뚜우 뚝 끊어낸다 꽃시절 한창인 나이에 일찍 어미가 된 내 어머니도 눈 질끈 감고 아까운 꽃 다 꺾어냈으리라 조카애가 생기고 나선 누이도 화장품값 옷값을 말없이 줄여갔으리라 토실토실 잘 익은 딸애를 등에 업고 형이 감자꽃을 딴다 딸이 생기고 나선 그 좋은 담배도 끊고 술도 잘 마시질 않는다는 독종 꽃핀 마음 뚜우 뚝 분지르며 한 소쿠리 알감자 품에 안을 날을 기다린다
손택수 시인 / 강의 페달을 밟으며
자전거 이름을 오디오라 지은 뒤부터다 체인의 어느 마디에서 북북쪽으로 옮겨가는 기러기 떼의 울음소리가 난다 가을 이맘때면 바큇살에서 억새 서걱이는 소리 서해 갑문을 통과한 게들이 강변 억세 위에서 딱, 딱 등딱지 부딪는 소리를 내기도 한다 질주에 도취한 나의 오디오에 부끄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수초들 자갈들 다 밀어낸 전용도로 속도감에 취한 쾌감이 어찌 착잡하지 않았을까 강물의 사라진 허리선을 기억하기 위하여 볼륨을 잃어버린 강의 노래를 받아 적기 위하여 심장 박동 소리 쿵쾅거리도록 페달을 밟는 그때 나의 혈관은 오디오로 이어진 케이블, 가고 있는 이 순간이 땅과 하늘에 플러그를 꽂은 저 풀과 나무들이 찌릿찌릿 전기를 통하게 한다면, 모순이여. 질주하는 동안 나는 처음이자 끝이다 당도하지 않은 채로 너의 가장 중심에 닿아있다 풀숲 꿩처럼 튀는 돌멩이들 강물에 끼워주는 물 바퀴를 굴리며 바퀴 페달을 오르간 페달처럼 밟으며
손택수 시인 / 거미줄
어미 거미와 새끼 거미를 몇 킬로미터쯤 떨어뜨려 놓고 새끼를 건드리면 움찔 어미의 몸이 경련을 일으킨다는 이야기, 보이지 않은 거미줄이 내게도 있어 수천 킬로미터 밖까지 무선으로 이어져 있어 한밤에 전화가 왔다 어디 아픈 데는 없느냐고, 꿈자리가 뒤숭숭하니 매사에 조신하며 살라고 지구를 반바퀴 돌고 와서도 끊어지지 않고 끈끈한 줄 하나
손택수 시인 / 광화문 네 거리엔 전광판이 많다
비가 오려나, 하늘을 보는데 옥외 전광판이 보인다 풀 칼라 고해상도로 발광하는 건물들 시사뉴스와 광고와 스포츠 영상을 끝없이 전송하고 있다 잠시도 무료할 틈이 없는 거리 여기선 멍청하게 하늘을 보는 게 허용되지 않는다 저물어가는 노을 대신 화려하게 명멸하는 이미지들을 따라가기 바쁘다 언젠간 밤하늘 별을 보면서도 뉴스나 광고를 생각하겠구나 리모컨으로 꾸욱 눌러 꺼버릴 수도 없는 전광판을 헤며 밤을 지새우기도 하겠구나 신호등 앞에서 잠시 넋을 잃고 있는 이마 위로 투둑 빗방울이 떨어진다 (11시 현재 누적 당첨금 75억 3천만 원 당신에게도 옵니다, 로또) 지나가는 광고 문구를 애무하며 주루룩 미끄러져 내리는 빗방울 허공에서부터 고해상도로 발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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